최고 기술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기술 패권 시대다. 인류복지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될 최첨단 기술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한편에서는 첨단 기술이 가져올 사회 변혁, 기술에 대한 신뢰 문제와 불평등 심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기술 혁신이 사회적 가치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공생의 생태계를 통해 공유가치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글로벌 리더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2015년 제70차 유엔총회에서 결의한 지속가능발전목표는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17개 지속 가능 발전 목표를 제시한 것도 지구촌 모두를 위한 포용적 기술 혁신에 무게를 실었다.
과학기술 연구개발 결과는 가치중립적일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다양한 편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의·생명 분야에서 남성(동물의 경우 수컷)을 기준으로 연구한 데이터에 다수의 젠더 편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경우 600여종의 의약 부작용이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크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심혈관 질환은 여성의 발생률이 더 높음에도 남성 기준으로 진단과 치료법이 개발돼 심혈관 질환으로 말미암은 사망률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았다.
젠더 편향성을 띤 과학적 지식과 데이터는 정보통신기술(ICT) 융합으로 새로운 편향성을 확대·재생산한다. 2019년 영국 '바빌론 헬스'에서 출시한 건강챗봇은 영국 의사 시험에서 사람의 평균보다 높은 성적을 거두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비대면 의료 서비스의 가능성으로 크게 주목받고, 막대한 투자 유치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건강챗봇은 젠더 편향성으로 고발까지 당했다. 이유는 문진 과정에서 가상의 59세 남녀가 왼팔의 저림과 왼쪽 흉통 등이 완전히 같은 증상을 호소하고 똑같은 흡연과 음주 습관을 제시했을 때 건강챗봇은 남성에게 즉시 응급실로 가라고 한 반면에 여성에게는 증상이 며칠 계속되면 가정의를 만나라며 젠더 편향적 조언을 했기 때문이다. 건강챗봇은 성별 특성이 반영되지 않은 영국국립보건원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남성은 심장마비, 여성은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로 진단했다. 이처럼 편향된 과학적 데이터는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공지능을 만들고, 막대한 투자 손실을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유럽연합(EU)은 2011년 포용적 기술 혁신을 위해 '젠더를 통한 혁신'을 가치로 내걸고 젠더 혁신 전문가 위원회를 구성해서 젠더혁신 사례와 어젠다를 발굴했다. 사례는 의·생명 분야에서부터 공학, 환경, 인공지능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발굴됐고, 2021년부터 시행되는 'HORIZON 유럽(2021-2027)'은 모든 연구 과제에서 성별 등 특성을 반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도 척추동물과 인간 대상 및 적용 연구 제안서에 성별 특성 반영을 요구하고 있다. 과학적 근거 없이 성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연구개발은 더이상 지원되지 않는 것이 세계적 추세이다.
우리나라는 2013년 최초로 성별 특성을 반영한 사례연구를 시작한 후 2021년 2월 (재)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가 설립, 젠더혁신 연구문화 조성과 정책개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2021년 4월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을 통해 과학기술기본계획 수립과 기술영향평가 및 통계·지표 관련 업무에서 성별 등 특성을 반영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제도적 기반을 갖추었으나 전면적 실행을 위해서는 다양한 전략과 투자가 필요하다.
첫째 '젠더혁신은 규제가 아니라 기회다'라는 연구문화 조성을 위한 투자가 필요하다. 성별을 고려하지 않은 연구는 재현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하나의 성을 기준으로 개발한 연구 결과를 남녀 모두에게 적용했을 때 심각한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 연구자 자율에 맡길 것이 아니라 기관 차원에서 우선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연구계의 자율적 참여를 위해 '젠더 혁신 과제'를 신설, 성공 사례를 널리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포용적 측면에서 젠더혁신 성과를 주기적으로 측정·발표한다. 이를 위해 성별로 분리된 적절한 데이터의 수집·관리·평가를 위한 적절한 인덱스 개발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가와 컨설팅을 담당할 수 있는 젠더혁신 전문가 확보가 중요하다. 나아가 대학(원) 교육과정에 포용적 기술 혁신을 반영해 미래 연구인력과 기술을 활용하는 대중이 지속 가능한 성장에 참여할 수 있는 인재 확보가 국가 경쟁력이 될 것이다.
이혜숙 이화여대 명예교수·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 hslee@gister.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