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 시절 그는 천성이 관료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형적'이었다.
업무는 주도면밀했다. 조정·관리 능력도 정평이 자자했다. 과장 시절부터 국장을 거쳐 실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한결같았다. 탁월한 업무 역량을 바탕으로 진흥과 규제를 두루 섭렵했다. 정보통신기술(ICT)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도는 남부러울 게 없다.
그렇다고 화려함을 추구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겸손함도 남다르다. 우리나라 ICT 역사에 기록할 만한 정책을 진두지휘했지만 그에게 묻지 않으면 먼저 이야기 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 일 잘하는 능력과 본인을 낮추는 태도는 청와대와 기획재정부 등 소속 부서가 아닌 곳에서도 연착륙하고 환영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관료에서 기관장으로 변신한 허성욱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 원장이다.
2월 취임한 허성욱 NIPA 원장은 조직 개편과 조직문화 개선, 임직원 소통, NIPA의 새로운 비전 구상에 한창이다. NIPA가 지역 정보화 혁신, AI 융합, 글로벌 진출 등 디지털 전환의 코디네이터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 클라우드와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정보통신기술(ICT)의 중요도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ICT와 무관한 산업에서도 디지털 기반 혁신을 위해 ICT를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난다.
급변하는 산업 환경에 맞춰 NIPA도 진화하고 있다. NIPA는 핵심사업을 AI와 소프트웨어(SW), 메타버스 등 분야기능별로 재편하고, 유망산업 육성을 위한 '단'급 조직을 신설했다. 새정부 국정과제를 적극 추진하는 한편 유연하고 도전적인 조직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다.
디지털 패권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AI반도체, 메타버스, 초거대AI 등을 위한 신규사업 기획, 예산 확보도 한창이다. 외부 전문가 목소리 청취를 위한 '디지털 혁신 리더스 밋업' 정기 운영도 시작했다.
허 원장을 만나 NIPA의 주요 사업 추진 현황과 향후 계획을 들어봤다.
대담=김원배 ICT융합부 부장
-취임 7개월이 지났다. 어떻게 지냈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있을 때 NIPA가 계획에 맞춰 사업을 진행하는 것을 지켜봐 왔지만 실제로 현장에 와서 보니 여러 가지가 달랐다. 누구에게 어떤 업무를 배정하고 사업을 어떻게 추진하는지 등 실제로 해보면서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가장 먼저 소통의 중요성을 느꼈다. NIPA 임직원은 묵묵히 일만 하는 모범생 스타일이라 애로사항이 있어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입사한 직원이 많은 데 이들과 기존 임직원 간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부임하고 나서 팀을 나눠 좌담회를 여는 등 소통에 가장 먼저 힘썼다.
부서간 합동 워크숍, 스포츠 동호회 운영, 코로나19로 중단됐던 직원간담회 재개 등 다양한 원내 이벤트 개최를 통해 자유롭고 격의 없는 분위기 조성에 힘쓰고 있다.
-조직개편은 어디에 주안점을 두었는가.
▲기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조직을 개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3개월 후를 목표로 잡고 임원들에게 좋은 방안을 제안해 달라고 했다. 3개월은 조직을 파악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지역과 디지털헬스, AI융합 등 유망 산업 분야를 적극 육성하는 것이다. 6월 디지털헬스사업추진단, AI융합추진단, 지역디지털혁신추진단 등 '단'급 조직을 신설한 것도 이 때문이다.
디지털헬스 분야는 NIPA가 운영하는 닥터앤서를 중심으로 의료 분야에서 보다 많은 가치를 창출할 계획이다. AI융합은 AI와 다른 분야의 융합(AI+X)을 확산하고, 지역은 디지털을 기반으로 지역 혁신을 지원할 방침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달라.
▲정보기술(IT)은 강남과 판교 등 수도권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지역은 상대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지역에도 IT 산업이 발달하고 제조업, 조선업 등에도 디지털이 가미돼야 한다.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AI 산업이 대표적이다.
지역은 수도권 기업과 경쟁을 하면 이기기 힘들다는 인식이 강하다. 지역디지털혁신추진단을 중심으로 이런 기업에 대한 컨설팅과 비즈니스 모델까지 지원할 계획이다. 금융, 헬스 등 분야별로 지원할 방침이다. 관련해서 지역을 위한 예산 확대도 논의 중이다.
스마트헬스 분야는 닥터앤서 관련 팀이 있었는데 이는 기업용(B2B) 중심이었다. 그러나 IT기업은 개인용(B2C) 사업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이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디지털헬스사업추진단을 만든 것이다.
AI융합추진단 역시 기존 본부를 단으로 만들어 AI의 산업별 융합을 촉진하기 위해 신설했다. 각 사업단은 단장이 선임팀장을 겸직함으로써 조직과 인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조직 변화를 위해 새롭게 추진하는 부분이 있다면.
▲조직개편과 함께 신경썼던 부분 중 하나가 외부 전문가와의 소통이다. 그동안 NIPA는 기업과 소통에 집중했다. 예산을 받아 지원하는 게 주요 업무였다. 하지만 실효성 있는 정책이나 사업 발굴을 위해서는 외부 전문가 의견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디지털 혁신 리더스 밋업'을 만든 이유다. 규제 개선, AI, 메타버스, 산업 발전, 해외 투자유치, 디지털헬스 등 다양한 분야별 전문가와 포럼을 통해 소통한다. 수천억원에 이르는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해사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내년 이후 집중할 사업은 무엇인가.
▲디지털 패권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AI반도체, 메타버스, 초거대AI 등 딥테크에 집중할 계획이다. 이를 위한 2023년 신규사업을 기획하고 예산 확보를 추진 중이다.
국내 기업이 개발한 AI반도체 적용 확산을 위해 서버, CCTV 등에 적용하는 실증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또 클라우드센터에 AI반도체를 선도 적용하는 AI반도체 팜 사업도 신규로 추진할 예정이다.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 지원도 강화할 방침이다. 디지털 치료제를 예로 들면 이 분야 기업은 해외 임상데이터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를 지원해주는 데가 없다. 개별 기업이 직접 해외 현지에 가서 데이터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경쟁력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사례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중요하다.
-해외 사업 관련 별도로 추진하는 게 있다면.
▲최근 베트남 현지에서 호찌민공대와 양해각서(MOU)를 교환했다. 소프트웨어(SW), 한국어 과정 등 커리큘럼을 만들어 인력을 양성하는 게 골자다.
베트남과는 올해 한·베트남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한·베 디지털 전환포럼'을 만드는 등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NIPA 현지 센터에서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원한다.
싱가포르 같은 경우 미국, 중국 등 글로벌 기업이 다 진출해 있는 상황이라 한국 중소기업은 입지가 좁은 상황이다. 현지 협회나 관련 단체에 국내 중소중견기업을 소개해 현지 진출이 활발해질 수 있도록 지속 모임을 추진할 계획이다.
-NIPA의 정체성, 전문성 등에 대해서 많이 강조했다.
▲왜 우리가 해야 하고, 왜 우리가 잘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면 잘할 수 있는지 임원들보고 얘기를 많이 해달라고 했다.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사업 추진에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전문성은 취임사에서도 강조했다. IT는 민간기업이 이끌어간다. 우리는 이들을 위해 수천억원 예산을 합리적으로 집행해야 한다. 우리 임직원이 잘 알지 못하면 어려운 일이다.
NIPA가 전문성이 없으면 외부 기업을 설득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이 없다. NIPA의 존재가치이기도 하다.
최근 직원이 민간기업으로 이직을 했는데, NIPA가 전문인력 양성의 사관학교, 전문기관이 될 정도로 전문성이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 디지털 대전환 시대 NIPA의 역할과 책임은 무엇인가.
▲코로나19 팬데믹, 디지털 패권경쟁 등 환경변화 속에서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ICT 기업이 창업 이후 성장하기까지 규제, 신규투자, 해외진출 등 다양한 어려움에 봉착하는데 NIPA는 이 같은 애로사항을 해소해주는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도 ICT 기업 성장 전주기를 지원하기 위해 창업, 규제개선, ICT신기술 지원사업, 기업 해외진출 등 다양한 기업지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앞으로 지속 강화할 계획이다.
또 디지털전환 의지는 있지만 전문성이 없는 기업, 기관을 가이드하고 선도하는 디지털 전환의 총괄 코디네이터(전담기관) 역할도 강화해야 한다. 이들과 협업을 통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융합 성과를 창출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NIPA는 디지털을 통한 지역균형 발전의 선도자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그동안 ICT산업은 주로 수도권 중심이었다. 타 산업 분야도 ICTSW와 융합을 통한 디지털혁신이 경쟁력 확보의 필수요소다. 지역특화산업의 디지털혁신을 촉진시키고 지역 ICT기업육성에도 보다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임기 내 '이것만은 꼭 이루고 싶다'는 목표가 있다면.
▲주요 산업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IRA)법 통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계는 지금 디지털 패권국가를 향한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다.
디지털 혁신 관련 주요 신기술의 개발과 육성을 담당하는 전문기관으로서 AI반도체와 디지털헬스케어, 메타버스 등 주요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성공사례를 만들 계획이다.
또 하나는 국민신뢰 기반의 공정하고 투명한 경영을 통해 기관 경영실적평가에서 A등급을 획득하는 것이다. 윤리경영 강화와 소통중심의 조직문화 구축을 통해 경영 효율성은 물론 정책과 사업의 효율성을 높일 생각이다.
-전자신문이 창간 40주년을 맞았다. 전자신문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한다.
▲전자신문은 코드분할다원접속(CDMA), 초고속 인터넷, 반도체, 휴대폰 등 ICT 산업이 초일류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 발 앞서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이었을 뿐 아니라, 산업 발전의 동반자 역할을 해왔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 디지털 패권을 향한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지금, 대한민국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해 전자신문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디지털 플랫폼 정부'의 성공과 '디지털 혁신'의 성공을 통해 대한민국이 디지털 패권을 잡을 수 있도록 냉철한 길라잡이 역할을 부탁한다. 길라잡이가 제시하는 방향을 잘 파악해 스마트하게 발전할 수 있는 주역이 되기를 희망한다.
◇허성욱 원장은
1993년 한양대 전자통신공학과를 졸업하고 기술고시를 통해 체신부에서 공직자 생활을 시작했다. 영국 요크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과 석사를 받았다. 정보통신부에서 인터넷정책과장, 네트워크기획과장, 정보보호기획과장을 거쳐 201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파견 근무했다.
2018년 이후 청와대(과기보좌관실) 선임행정관, 기획재정부 혁신성장정책관을 역임했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보통신정책관, 정보보호네트워크정책관, 네트워크정책실장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22년 2월부터 정보통신산업진흥원 원장으로 ICT산업 경쟁력 제고, 성장동력 육성을 통한 국민 삶의 질 향상에 집중하고 있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