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직종을 선호한다. 잘 나가던 플랫폼 기반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에 청년의 관심이 폭증한 것도 이런 배경이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는 전통 제조업 기반 ICT 산업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자동차가 오랜 기간 대학생이 취업하고 싶은 기업 상위권에 꼽혀왔다. 급여가 높고 이직을 해도 알아주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이 기업이, 아니 우리나라 대기업 대부분이 제조업 기반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까. 글로벌 랭킹에 든 한국 기업 상당수가 업종의 다양성과 성장성 측면에서 점차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대 청년과 대한민국 미래를 책임질 신산업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제조업, 벤처 열풍…다시 제조업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신화는 제조업에서 피어올랐다. 지금도 여전히 제조업이 매우 강한 나라다. 전국 산업 분포뿐만 아니라 기업 매출액, 법인세 납부 실적, 수출액 비중 등 대부분 지표가 이를 입증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30년간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선진국은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이 평균 5% 정도 감소했으나, 우리나라는 27.6% 수준에서 오랜 시간 견고한 산업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자동차 등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제조업이 국내 산업 규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반면에 유통이나 통신, 금융기업은 여전히 글로벌 성공 모델을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산업 구조를 갖게 된 배경은 '빛과 그림자'의 평가를 받아온 제3공화국 시절부터 시작한 중화학공업 육성 역사와 맞물린다. 전형적인 농경 사회였다가 공장을 세우고 대량 생산을 시작한 우리나라 제조업 시작은 영국 산업혁명에 비해 200년 이상 뒤처졌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제조업 중심의 압축 경제성장은 1970~1980년대를 거쳐 가속화하면서 선진국을 추격할 만한 국력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중후장대(重厚長大)'형 산업 구조에 '경박단소(輕薄短小)'형 기술을 장착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1997년 말 대한민국을 덮친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변곡점이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벤처기업 육성 정책을 실시했다. 누구든지 아이디어만 있으면 제안서를 통해 정부 자금을 지원받는 분위기였다. 정부는 법과 제도를 과감하게 정비해 가며 이른바 'IT붐'을 일으켰고 그 결과 '닷컴 시대'를 열어 대한민국 벤처 1세대를 배출했다. 이는 대기업 위주 안정화된 모델로는 더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직시한 데서 비롯된 과감한 시도였다.
우리나라 산업지도를 바꾼 양대 정책의 작동 방식에서는 뚜렷한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제3공화국 시절은 철저한 선택과 집중을 근간으로 한다. 제조업, 특히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산업과 기업을 지정하고 지리적 입지를 선정한 후 집중적으로 정부가 지원하는 모델이었다. 이에 반해 벤처기업 육성에는 국가 지원의 폭을 한층 넓혔다. 투자를 받은 많은 기업 가운데 뚜렷하게 성공하는 모델이 자생적으로 성장해 산업 전반에 분수 효과를 뿌리는 형식이었다. 국가에서 주는 세제 혜택의 종류도 다양해 기업은 기민하게 움직이며 벤처 생태계를 형성해 나갔다. 불행히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겪으며 대한민국의 벤처 열풍은 한풀 꺾였고 대한민국은 다시 제조업에 기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규제의 덫, 기술발전·인력양성 막아
기업에는 '기술' 발전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양립 과제가 늘 따른다. 심지어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 규제의 공백을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도 따른다. 국내 제조업도 마찬가지다. 규제는 산업이 생기고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제조업 강국 대한민국에도 늘 규제가 증가했다. 역대 대통령이나 관계 장관 누구나 규제 완화와 개선을 약속했으나 성과가 크게 드러나진 못한 감이 있다. 규제 개혁 업무에 대해 규제를 하거나, 규제 완화가 필요한 곳에는 규정을 재검토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다는 의견이 제기되는 이유다.
현재 정부 내에서 규제 개선업무의 최고 기관은 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다. 규제개혁위원회는 취지와 달리 뚜렷한 한계에 노출된다. 우선 대통령실 산하가 아닌 까닭에 관계자의 관심이나 집중도가 떨어진다. 개선이 필요한 규제를 발굴하거나 주도적으로 끌고 가기에는 힘에 부치는 양상이다. 규제는 각 부처 소관이다. 총리실이 부처별 담당자에게 연락해 안건 처리하기도 바쁜 상황이라 산업별로 필요한 규제 개혁을 이끌어 내기 쉽지 않은 모양새다. 규제 개혁을 주도하고 총괄 조정기능을 수행하는 쪽으로 조직 위상과 권한을 대폭 보강할 필요가 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규제를 했는데 도리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규제도 도처에 깔려 있다. 따라서 규제를 신규 적용할 때는 부작용을 고려해 신중하게 접근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정부 입법은 법제처에서, 국회의원 입법은 법사위 등을 통해서 유사 중복 규제를 정비하지만 부처 간 효율적인 입법 활동과 협조체계가 절실하다.
산업 인력 양성을 저해하는 규제도 손을 잘 매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학과별 정원 조정 권한은 교육부에 주어져 있다. 특정 분야의 산업 인력 수요가 늘어나면 이에 맞게 정원을 늘려야 하는데 해당 업종 종사자 반발 등으로 정원을 제때 늘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정원 관련 비(非)유연성은 시대별로 꼭 필요한 인재 양성을 더디게 한다. 최근 정부가 신산업 분야 석·박사급 인력 확보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나아가 전문 인력 양성의 전제 조건인 교수인력 확보 방법도 획기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국가 재원 투입…지속성·전문성 필수
규제 개혁과 함께 정부의 재정 지원은 미래 신산업 생태계의 중요한 자양분이 된다. '기회의 공평'이라는 명분에 얽매여 예산을 모든 기업에 기계적으로 나눠주는 방식은 효용을 장담치 못한다. 기업이 당장 한숨 돌리는 데 유용할지는 몰라도 산업의 중장기 성장 모멘텀 확보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부 지원 방식이 창업 초기자금 지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보니 그 이후 성장 단계에 접어든 기업이 절실히 요구하는 정부 지원은 끊기는 문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책 자금을 지원하는 정부 기관이 여럿이다 보니 동일 지원을 중복해서 받는 기업이 생겨난다. 아니면 돌아가면서 순번대로 지원을 받는 관행도 여전한 편이다. 결국 기업 수명만 연장할 뿐 나중에 생산성은 없고 생명만 유지하는 '좀비 기업'이 양산되는 현실은 정부 재정 지원 정책의 어두운 한 단면이다. 게다가 담당 공무원은 대부분 순환보직 시스템에 따라 1~2년 단위로 업무가 바뀐다. 당연히 전문성과 연속성을 확보하기에 곤란한 구조다. 정책 지원 부서의 경우 선택과 집중에 기반한 전문 역량을 갖춘 공무원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 매년 바뀌는 담당자 때문에 애로사항을 매번 말하기도 지쳐 포기한다는 말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진전이 없는 것이 더 슬픈 현실이다. '내가 가고 싶은 부서를 제한받지 않는 것'도 공무원의 권한이라거나, 공무원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고 기업 편의를 다 들어줄 수도 없고, 그렇게 하다가 감사받아 불이익만 당할 뿐이라는 방어논리를 뚫을 수 있을 때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첨단 신산업과 관련한 규제는 대부분 다른 부처나 기관들, 심지어 힘이 강한 이해관계자들로 둘러싸여 있다. 전문가에게 자문을 받으려 해도 산업정책, 연구개발, 자금지원(VC), 기업분석 등 다양한 분야를 복합적이고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전문가마다 각자의 경험과 관점 등으로 의견이 나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결이 다른 의견을 제시했을 때 적용 대상이나 시기를 구분해 정책반영과 집행 포인트를 찾아낼 수 있는 높은 안목도 필수다.
외국의 경우 'Cross-Cutting Issue'라고 해 복합적 사안에 대해 수평적으로 협의하고 조정하는 제도나 문화가 발달 돼 있다. 여기에서 시사점을 얻어 우리에게 취약한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사례를 조사하여 한국화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정부의 업무평가를 산출(output) 중심에서 성과(outcome) 위주로 전환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 인력과 예산의 투입이 종료되면 큰 성과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연구개발을 통한 성공사례가 없어도 예산투입은 계속되고, 개선이 안 될 줄 알면서도 개선방안을 계속 발표해 누더기로 만드는 시행착오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전략 키워드:복합형, 직주근접형, 맞춤형
앞으로 정부의 신산업 지원 방식은 더 똑똑해져야 한다. 과거 제조업 육성 시대의 마인드와 관행으로는 곤란하다. 예컨대 입지 중심의 업종별 클러스터가 경쟁력의 요체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첨단 신산업을 새로이 육성하자면 업종 간 자유로운 연계가 가능한 '복합형'으로 지원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또 정부가 자유로운 업무 환경을 뒷받침하고 워라밸이 가능한 '직주근접형' 산업 생태계를 만들거나, 일괄적인 지원정책을 뛰어넘는 '맞춤형' 지원도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맞춤형'까지는 어렵더라도, 기계적 '획일성'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도 큰 진전이 될 수 있다.
최근 미국과 중국 등 패권을 지향하는 국가는 전략 산업의 설계와 육성, 배치까지 정부가 주도하는 경향을 보인다. 바야흐로 경제와 산업에 '국가주의'가 깊숙하게 개입하는 시대에 접어든 셈이다. 안팎의 경제적 도전에 정부는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국내 창업은 활성화돼야 하고, 기업가의 자율성은 고도로 보장돼야 한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배움엔 끝이 없다'에서 수수께끼 기능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고 있다. “수수께끼는 그것에 최종적인 해답을 제공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조건이 바뀌고 장소가 바뀌어도 어디에서라도 다양한 해답을 맞히려는 시도를 불러일으키려는 것, 그것이 수수께끼의 기능이다” 대한민국도 미래 신산업 육성이라는 수수께끼를 마주하고 있다. 정답도 좋지만 다양한 해법을 효율적으로 강구하는지에 따라 앞날의 승패가 결정된다고 할 것이다.
임성은 서울기술연구원장 ych5534@sit.re.kr
<필자>임성은 원장은 서울시립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행정고시 출제·선정 위원, 서울특별시 연구실장 등을 역임했다. 서경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국책연구원 평가위원을 거쳐 현재 서울기술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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