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차체와 넉넉한 공간감이 마음을 여유롭게 만든다. 부드럽게 페달을 밟으며 천천히 달리는 맛이 일품이다.
지프를 대표하는 프리미엄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그랜드 체로키'가 5세대로 진화했다. 4세대 출시 이후 무려 11년 만이다. 지난 30년간 그랜드 체로키는 세계에서 700만대 이상 팔리며 '랭글러'와 함께 가장 성공한 지프의 베스트셀링 모델 중 하나로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
지난해 11월 국내에 데뷔한 완전 변경 모델 '그랜드 체로키 L'을 시승했다. 5세대는 차체 크기에 따라 숏바디와 롱바디로 구분하는데 국내에는 3열 시트를 갖춘 롱바디 모델 L을 판매한다. 여유로운 실내 공간을 선호하는 한국 소비자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만하다.
가장 큰 변화는 더 커진 차체다. 4세대 그랜드 체로키는 전장이 4820㎜로 동급 모델보다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그랜드 체로키 L은 덩치를 키우며 한눈에 봐도 웅장한 차체를 자랑한다. 전장은 5220㎜, 축간거리는 3090㎜로 4세대와 비교해 전장이 400㎜, 축간거리가 170㎜ 길어졌다.
커진 차체에도 비례감은 준수하다. 전체 외관은 지프 브랜드의 플래그십 SUV '그랜드 왜고니어' 디자인 요소를 계승했다. 전면부는 지프를 상징하는 세븐-슬롯 그릴이 양옆으로 넓게 펼쳐진 모습이다. 사선으로 날카롭게 떨어지는 듯한 '샤크 노즈'는 강인한 느낌을 준다. 지프 고유의 사다리꼴 휠 아치에는 커다란 21인치 휠을 넣어 균형감을 살렸다.
실내는 지금껏 시승해본 지프 모델 중 가장 화려하다. 운전석에 앉으면 10.25인치 디지털 게이지 클러스터 컬러 디스플레이와 스티어링 휠(운전대) 중앙에 위치한 사각형 지프 엠블럼이 눈길을 끈다. 중앙 10.1인치 맵-인-클러스터 디스플레이는 넓은 화면과 편리한 조작감으로 직관적인 사용자 경험(UX)을 제공한다. 실내 전체를 감싸는 멀티 컬러 앰비언트 LED 라이팅은 은은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수작업 공정을 통한 완성도 높은 실내 마감 처리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시승차는 상위 트림인 써밋 리저브로 촉감이 부드러운 프리미엄 팔레르모 가죽 시트를 장착했다. 1열에서는 마사지 기능까지 즐길 수 있다. 시트 구성은 1열 2명, 2열 2명, 3열 2명 등 총 6인승 구성이다. 다른 3열 대형 SUV들과 다르게 모든 시트를 독립식으로 구성해 어느 자리에 앉아도 여유롭다. 트렁크 적재 공간은 기본 490ℓ로 시트를 모두 접으면 2390ℓ까지 활용할 수 있어 레저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시동을 걸면 3.6ℓ 배기량을 지닌 V6 24V VVT 가솔린 엔진이 깨어난다. 6기통 엔진답게 부드러운 음색을 들려준다. 최고출력은 286마력, 최대토크는 35.1㎏·m로 폭발적이진 않지만 무난한 힘을 보인다. 이와 맞물린 8단 자동변속기는 효율적으로 엔진 회전수(rpm)를 조절해 정숙성, 가속 반응성, 효율성 등을 개선했다.
전천후 사륜구동 시스템은 지프가 내세우는 세일즈 포인트다. 그랜드 체로키 L에는 지프가 개발한 쿼드라-트랙 II 4X4 시스템을 탑재했다. 2.72:1 기어비의 낮은 토크 제어로 오프로드에서의 기동성을 높였다. 다수 센서가 사전에 토크 분포를 조정해 미끄러운 노면에 즉각 반응한다. 주행 조건에 따라 다섯 가지 주행 모드를 선택할 수 있는 셀렉-터레인 지형 설정 시스템은 잘 닦인 도심은 물론 험로 주행 시 최적화된 구동력을 전달한다.
110개 이상의 주행 관련 첨단 기능도 주목된다. 전방 카메라를 통해 차선을 감지하고 차선 변경 시 사각지대 모니터링 센서로 인접한 차량을 감지해 경고하는 액티브 레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비롯해 보행자·자전거 감지 긴급 브레이킹 시스템, 2·3열 탑승자를 실시간 확인 가능한 뒷좌석 모니터링 카메라 등을 장착했다. 360도 서라운드 뷰 카메라와 헤드 업 디스플레이(HUD) 등은 커다란 SUV를 편안히 몰 수 있게 돕는다.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액티브 레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결합해 작동하는 액티브 드라이빙 어시스트 시스템을 활성화하면 고속도로 등 특정 주행 환경에서 레벨2 수준의 부분 자율주행 기능을 즐길 수 있다.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촬영한 이미지를 계기판 디스플레이에 표시하는 나이트 비전 카메라 시스템은 밤길 운전에 자신감을 준다. 평행과 수직으로 주차와 출차를 보조하는 파크센스도 갖췄다.
인포테인먼트 측면에서도 한 단계 진화한 UX를 보여준다. 한국 고객을 위해 개발한 '티맵'을 지프 모델 중 처음 탑재했다. 무선 애플 카플레이와 안드로이드 오토를 통해 스마트폰을 연결할 수 있다. 오디오 브랜드 '매킨토시'가 개발한 사운드 시스템은 19개의 스피커로 청명한 음질을 들려준다.
아쉬운 점도 있다. 연비와 가격이다. 2.3톤에 달하는 덩치 탓에 복합 연비는 7.7㎞/ℓ에 머문다. 시승 당일 도심에서 6㎞/ℓ대, 고속도로에서 9㎞/ℓ대를 달릴 수 있었다. 개선된 상품성만큼 가격도 많이 올랐다. 그랜드 체로키 L 써밋 리저브 트림 가격은 9780만원이다.
정치연기자 chiye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