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캠퍼스를 거닐다 운동장에서 모형 자동차 운행을 시험하는 학생들과 마주쳤다. 모형 자동차라고는 하지만 꽤 큰 규모였고, 차체 뒤편에 설치된 노트북 컴퓨터를 통해 자동차 움직임을 조종하게 돼 있었다. 무선 조종기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반(半)자율주행 차인 모양이었다. 한 학생이 의견을 냈고, 이들은 자동차를 멈추고 컴퓨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무언가 수정하더니 다시 모형차를 작동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져서 어두컴컴해졌고 학생들은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어디론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학생들은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할까? 돌아가는 한 명을 붙잡고 물어보니 자동차공학을 전공하는 학부생 동아리 회원이라고 한다. 곧 열리는 자작 자동차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목표와 해결할 과제가 주어지면 학생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해결책을 모색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기계공학 지식이 필요하면 이용하고, 제어공학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면 그것을 연구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고민을 거듭한다. 이것이야말로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학문 분야를 활용하는 진정한 의미의 학제 융합이 아닌가. 이미 초보적인 차원에서 '융합'의 의미를 깨우치고 있었다.
대학은 학생이 스스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앞으로 30년 후, 50년 후 한국 사회에는 어떤 기술 수요가 있을 것인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모두가 관심을 두고 있지만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대학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통찰을 키울 수 있는 유연한 융합교양 교육을 통해 학생이 토론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대답을 찾아갈 수 있는 지적 근력(筋力)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스스로 설정한 문제 해결에 필요한 학문적 자원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융합적 전공 교육 체계를 갖춰 실질적인 문제 해결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생은 대학에서 죽은 지식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지식을 접하고, 이를 바탕으로 무언가를 창출하는 경험을 쌓아야 한다. 21세기 한국 대학은 바로 이것이 가능한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런 대학 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추가 재원 투입이 필수다. 세계 유수 명문 대학이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학생 1인당 투입하는 교육비의 압도적 격차가 있다. 교수 1인당 10명을 가르치는 대학과 50명을 가르치는 대학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50명이 수강하는 교양 교과목에서 수업 조교도 없이 토론식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어렵다.
필요에 따라서는 대학 사이의 인적·물적 자원 공유와 협업으로 풀어갈 수도 있겠지만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지금처럼 예산이 극도로 제약돼 있고, 그나마 확보한 예산조차 정작 필요한 곳에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대학 교육의 대대적 전환은 요원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유연한 융합교육으로 전환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중복투자를 허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대학을 둘러싼 논의가 학령인구 감소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대학 정원을 감축하고 부실 대학을 폐교하는 방법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위기에 대한 소극적 대응이다. 현대사를 돌아보면 한국이라는 신생 독립국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보다도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있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되면서 숙련된 기능공 양성이 시급한 국가 과제로 떠올랐고, 1980년대 이후 자동차, 조선, 반도체 산업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엔지니어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 이제 바이오테크놀로지와 인공지능(AI) 등 새로운 첨단기술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연구개발(R&D) 능력을 갖춘 고급 인재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대가 됐다.
새로운 산업 분야를 개척하고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R&D에 종사할 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유사시 국방 능력을 갖추기 위한 방위산업에 대한 고려도 시급한 일이다. 한국이 처해있는 대내외적 상황을 감안했을 때 저출산 위기는 대학에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질적인 도약을 이루는 소중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
캠퍼스에서 만난 자동차 동아리 학생들이 지금은 국내 공모전에 참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곧 더욱 거대한 야망을 품고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다양한 전공의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각자 학문 영역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결과물을 창출하기 위해 전통적인 학제라는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대학이 되기를 바란다. 대학은 학생들이 꿈을 키우고 꿈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지원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대학의 지도자는 학생들이 최대한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대학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정부 역시 '학령위기 감소'라는 위기에 대한 소극적 대응을 넘어 현재 상황을 한국에서 대학 교육의 품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계기로 삼는다는 적극적 대응으로 정책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이것이 과학기술 인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장하는 길이다.
이동훈 서울과학기술대 총장 ldh@seoultech.ac.kr
◇이동훈 총장은…
서울과학기술대 출신 1호 총장으로, 기계공학과에 입학해 숭실대에서 기계공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서울과기대에 부임해 창업보육센터소장, 산학협력단장, LINC사업단장, 연구산학부총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아 대학 발전에 힘을 쏟았다. 전국대학교산학협력단장, 연구처장협의회 부회장, 서울테크노파크 이사, 한국도시철도학회장을 역임했다. 2019년 11월 22일 서울과기대 제12대 총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