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영의 시대정신]<5>결이 다른 대통령

[여호영의 시대정신]<5>결이 다른 대통령

대통령의 메모를 보는 순간 전율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낀다. 메모가 쓰인 때는 1971년 7월이다. 고도 경주를 재개발하라는 내용의 지시 메모다. 쓰인 종이의 크기는 A4용지 4분의 1 크기다. 재질은 갱지다. 요즘 주로 쓰는 A4용지보다 재질이 떨어지는 수준이다. 메모지의 상단 정중앙에 대통령 휘장을 금박으로 찍어 놓은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대통령 각하 지시 사항'이라고만 쓰여 있다. 메모는 간단하다. “신라 고도는 웅대, 찬란, 정교, 활달, 진취, 여유, 우아, 유현의 감이 살아날 수 있도록 재개발할 것”이라고 적혀 있다. 비서가 대신 써 준 것이 아니다. 비서진 의견을 종합해서 대통령이 작성한 것도 아니다.

지시 내용은 대통령의 정신세계에서 출발했다. 국가관, 역사관을 제대로 반영했다. 고도를 어떻게 재개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지에 대한 식견이 담겼다. 친필로 작성한 것이다. 짧은 지시문을 통해 느낌을 받는다. 지시문은 대통령의 결기, 해박한 안목, 정확한 지향성, 다양한 어휘력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다. 특히 맨 마지막에 쓰인 용어, '유현'(幽玄)이 인상적이다. 잘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경주의 고유성(아이덴티티)을 띠기 위한 여러 특징 가운데 한 가지를 선정한 것이다. 유현은 이치나 아취(아담한 정취)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미묘하다라는 뜻이다. 깊숙해서 아늑하고 고요하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궁극적 차별화를 마련하라는 뜻이다. 소설가 가운데 '혼불' 저자 최명희의 어휘력이 풍부한 것으로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신조어를 창안해서 소설에 사용한다. 유사한 단어 몇 개를 수직으로 배치해 놓고는 첫 음절 한 자는 어느 단어 첫 마디에서 따고 두 번째 음절은 다른 단어의 두 번째 음절에서 따와 여러 가지로 조합해서 만들어 보는 것이다. 처음 읽게 되는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신조어가 나오면 창작 단어가 된다. 창안된 단어가 소설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된다. 창작의 시원을 가르는 것이다.

대통령의 유현은 이렇게 조어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일류 소설가도 잘 사용하지 않는 용어다. 지시문에서 이 유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대통령의 지적 수준은 천재에 가깝다. 사전을 뒤적여서 골라낸 용어가 아니다. 신라 고도가 재개발된 이후의 모습은 가장 쓸모가 있어야 한다. 선진국의 고도 재개발에서 보여 주는 일반적인 전략 말고도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판단이 곁들어진 것이다. 유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가치를 발현한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바라는 방향이 유현 한 단어에 함축돼 있다. 선전 매체를 통하지 않고도 널리 알려질 수 있어야 한다. 주변의 아무런 도움 없이도 고유함을 빛낼 수 있어야 한다. 탁월한 문화적 가치를 되살려 널리 또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야 한다. 다시 찾고 싶은 고도여야 한다. 대중가요 '황성 옛터'를 십팔번으로 하는 대통령과 신라 고도는 오래 전부터 심정적으로 서로 닿아 있는 것이다.

경주 고도 재개발 시기에 보문단지 개발도 있었다. 타원형 모양의 보문호를 중심으로 10여 구역으로 쪼개어 고급 호텔, 콘도 등 10여개 시설을 지었다. 불국사의 청운교 자하문 등과 회랑을 개축했다. 석가탑도 보수했다. 다라니 불경이 나왔다.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본이다. 경주박물관도 신축, 이전해서 개관했다.

대통령은 1979년 봄에 서울시를 통해 88올림픽 유치를 신청했다. 미래를 내다 보는 지도자의 안목이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함께 온다. 40여년 동안 이 정도 수준의 지도자를 맞이한 적이 없는 대한민국은 얼마나 혼돈스러운가를 느끼며 자책한다. 출생률 폭락, 중산층 해체, 영세 상공인 몰락, 수도권 집중 현상, 교육 개혁과 대학 자율성은 시들은 깻잎 같다. 국민연금 개혁은 표류하고 태어나지 말아야 할 가덕도 공항, 소형 원자로 개발비를 삭감하는 어처구니없는 정략 등 해결은커녕 더욱 꼬여만 간다. 조국을 유현하게 재창조하는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한다.

여호영 지아이에스 대표이사 yeohy_gi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