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연구개발(R&D) 패러독스'라는 자조적인 말이 있다. 우리나라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1~2위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R&D 투자를 하는 데도 성과는 신통치 않다는 비판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R&D 패러독스'라는 말은 1990년대 스웨덴에서 비롯됐다. 상당한 R&D 투자에도 스웨덴 경제에 미치는 기여가 별로 없다는 비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 자극적 신조어는 우리나라에서도 R&D 투자 효용성을 비판하기 위해 왕왕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의 R&D 투자는 내년에 30조원이 넘을 것이 확실하며, 민간을 포함한 국가 전체 투자는 GDP 가운데 4.8%인 100조원에 이른다. 경제 개발에 첫발을 떼던 1963년 당시 GDP의 0.25%이던 12억원이 국가 R&D에 투자한 전부였음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다.
과학기술 R&D 투자 성과를 말할 때 우리는 국제논문, 특허, 기술무역 수지와 같은 정량적 수치에 의존한다. 그런데 우리 과학기술 성과는 적어도 정량적으로는 수준급이다. 국제논문 편수는 연간 7만여건으로 세계 논문의 4% 정도에 해당하며, 특허 출원도 2021년 약 24만 건으로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국제특허(PCT) 출원은 2만여건으로 세계 4위에 해당한다.
문제는 성과의 질에 있다. 최근 3년 동안 많이 인용된 과학논문 순위에서 11위를 기록해 12위인 일본을 넘어섰지만 아직 최상위 논문 수는 적으며, 대표적으로 노벨과학상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기술무역수지는 적자를 지속하고 있으며, 쉽게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시각을 조금만 바꾸어 보자. 세계지식재산기구(WIPO)가 발표한 2022년 세계혁신지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 132개국 가운데 6위다. 쟁쟁한 국가를 제친 비결은 1위를 차지한 '인적 자원 및 연구' 항목에 있다. 창의적 성과(4위), 지식 및 기술 성과(10위)도 상위권이다.
무엇보다 발목을 잡는 것은 31위를 차지한 '제도'이다. 한편 스위스 IMD에서 발표한 2022년 국가 경쟁력 순위에서는 우리나라가 63개국 가운데 27위에 그쳤다. 그나마 세부 항목에서 과학 인프라가 3위, 기술 인프라가 19위를 기록했다. 순위를 끌어내린 것은 역시 정부효율이었다. 남들은 우리 국가 경쟁력 중심에 과학기술이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성공은 경제발전이라는 임무(미션)에 맞춰진 국가 운영체제 덕이다. 과학기술도 예외가 아니였다. 헌법에서조차 '과학기술 혁신과 정보 및 인력개발을 통해 국민경제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쓰여 있다. 이 미션을 이루기 위한 전략은 선진국 모방형의 이른바 '빠른 추격자' 전략이었다.
이 같은 전략 아래 기술무역수지가 적자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어렵고 오랜 시간이 필요한 원천기술 개발 대신 선진기술을 빠르게 도입하고, 그 비용은 제품을 만들어 내다 팔아서 생기는 이익으로 충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발전이라는 미션을 어느 정도 이룬 지금 인간이 달에 착륙하면 그다음 화성이나 더 먼 우주를 탐험해야 하듯 과학기술은 새로운 미션을 부여받아야 한다. 새로운 미션을 이루기 위한 전략이 달라져야 함은 물론이다.
새 전략의 키워드는 두말할 필요 없이 '창의성'과 '도전정신'이다. 이를 북돋기 위해 건강한 '생태계 조성'은 필수다. 과거 '목표 달성' 여부가 판단 기준이었다면 앞으로는 '가치 창출'이 기준이 될 것이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성과 평가의 틀을 바꾸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나라 논문 숫자에 비해 영향력 있는 논문이 적은 것은 논문 수로 성과를 평가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에 주어진 새로운 미션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먼저 지금까지 R&D 투자로 창출한 성과를 '가치'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예컨대 R&D 투자의 대표적 성과인 인력 양성은 데이터도 별로 없고, 성과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냉정한 평가가 바탕으로 작용할 때 새롭게 만들어질 틀이 효용성 논란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며, 비로소 제대로 된 코리아 R&D 페르소나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우일 한국과총 회장, 서울대 명예교수 wilee@kof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