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제조혁신을 지원하는 디자인

윤상흠 한국디자인진흥원장
윤상흠 한국디자인진흥원장

제조기업 신음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상과 우리나라 주요 수출 대상국인 미국·중국·유럽연합 등 '빅3'의 경기 위축에 따른 수출 둔화, 지정학적 긴장 장기화 등으로 제조업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통계청이 펴낸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지난 10월 제조업 생산지수는 전월보다 3.6% 감소했다. 2020년 11월 이후 23개월 만의 최저 수준이다.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전월 75.1%에서 72.4%로 급락했다. 여기에 더해 환경 규제 강화와 디지털전환 등 산업구조 변화에 신속히 대응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면서 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제조업 경기 후퇴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여파는 상당하기 때문에 산업 최일선에 있는 제조기업의 성장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2021년 기준 27.9%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기준 제조업 종사 가구주의 근로소득은 전체 가구주 근로소득의 26.9%로 나타났다. 모든 산업군에서 가장 컸다. 제조기업의 경영난은 가계 소득 악화 및 소비 침체, 산업 전반의 고용 감소 등으로 이어져서 경제에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제조기업 성장을 위해 다양한 전략이 논의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전통적이고 대표적인 성장 모델은 사업다각화다. 많은 기업이 위험을 효과적으로 분산하는 동시에 범위의 경제를 실현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사업다각화를 추진한다. 일회용 볼펜을 생산하던 'Bic'이 자신만의 플라스틱 사출 성형 기술과 유통 노하우를 활용해서 일회용 라이터 시장에 진출한 사례와 계측기 회사로 출발한 'HP'가 탁월한 전자 기술을 바탕으로 프린터를 제조·판매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사업다각화가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고객 관점에서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다각화는 오히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다. 모 스팀생활가전 제조업체는 시장 성숙화에 따른 성장 부진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신제품을 쏟아내며 사업다각화를 추진했으나 투자 대비 부진한 실적으로 심각한 적자와 자본잠식에 시달린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실패 사례의 원인으로 고객가치를 위한 탐색 활동이 미흡한 점을 꼽았다.

사업다각화의 성공을 결정짓는 고객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어떤 역량이 필요할까. 바로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고객의 잠재된 니즈를 충족시켜 주는 제품의 새로운 가치를 실체화하는 작업이다. 디자인의 이러한 특성은 '닌텐도 위(wii)' 성공신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닌텐도는 경쟁사가 기술과 기능 향상에 집중할 때 차별화한 고객경험에 대해 고민했다. 친근한 그래픽, 전 세대를 아우르는 캐릭터, 단순하고 쉬운 조작 등 남녀노소 모두 만족할 디자인을 통해 가족과 함께 즐기는 신개념 콘솔게임기 '닌텐도 위(wii)'를 만들었다. '청소년의 불량스러운 취미를 위한 도구'이던 기존의 게임기와 달리 '가족과 함께 여가를 즐기기 위한 도구'라는 새로운 가치를 보여 준 '닌텐도 위'는 10~20대에 집중되던 게임 사용층을 크게 확대하며 콘솔게임기 시장에서 전례 없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닌텐도 위' 개발 과정에는 서비스 디자인, 사용자 경험 디자인, 인터랙티브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제품 디자인 등 다양한 디자인이 적용됐다. 즉 닌텐도가 '닌텐도 위'라는 신개념 콘솔게임기를 개발하는 모든 과정에 '디자인'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이처럼 디자인은 제품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서 고객이 해당 제품을 찾게 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ET시론]제조혁신을 지원하는 디자인

정부도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제조기업의 디자인 경쟁력을 높여서 제조업 부흥을 견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디자인진흥원은 2019년부터 산업단지 내에 디자인주도 제조혁신센터를 설립하고 중소·중견 제조기업 대상으로 신사업 기획·개발을 위한 디자인 활용을 지원하고 있다.

제조업체 혁신을 도모하기 위해 기업 디자인경영의 역량을 분석하고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한 현장 밀착 컨설팅을 실시한다. 완제품 제조기업에는 디자인 개선이나 사물인터넷(IoT) 기술 활용을 지원, 제품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돕는다. 소재·부품 등을 생산하는 중간재 기업이나 뿌리기술을 보유한 기업에는 자사 기술을 접목한 자체 상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회의실과 공유오피스를 비롯해 최대 4000여개에 달하는 소재·부품을 전시한 'CMF라이브러리' △제품 홍보 영상 녹화와 라이브 스트리밍이 가능한 '스마트 스튜디오' △기업 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포토 스튜디오' △디자인 작업 및 소규모 워크숍이 가능한 '디지털 스튜디오' 등 제조혁신센터에 구축된 다양한 제반 시설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디자인 지원을 제공한다.

최근까지 디자인주도 제조혁신센터는 서울 G밸리, 경기 반월·시화, 경남 창원, 경북 구미, 광주 첨단 등지에 설치·운영됐다. 1000여개 기업이 제조혁신센터를 통해 디자인 컨설팅부터 디자인 개발, 홍보·마케팅 등 기업 수요에 맞는 각종 지원 서비스를 받았다.

리모컨 제조업체 오성전자는 경북 제조혁신센터를 통해 디자인 컨설팅 및 디자인 개발을 지원받아 자체 친환경 제품 개발에 성공, 유럽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이 회사는 국내 최고의 리모컨 개발·제조 기술을 보유한 기업으로, 완제품을 생산할 자체 역량이 충분히 있었으나 제품 개발을 위한 디자인 인력 부재로 제조자개발생산(ODM) 방식 비즈니스 모델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다. 제조혁신센터의 지원을 통해 인체공학적 디자인과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해 사용자 편의성을 높인 자체 친환경 리모컨 제품을 개발, 자사 제품을 세계 시장에 직접 선보일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며 전·후방 산업을 모두 아우르는 기업으로 발전했다.

반도체 소재 및 산업용 세척제 납품업체 나노테크 또한 경북 제조혁신센터의 도움을 받아 자체 제품을 개발, 사업다각화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 일라이트 광물을 실내 탈취, 방습·제습, 공기정화 등에 탁월한 '숨라이트'라는 친환경 소재로 가공하는 독보적인 기술을 갖춘 나노테크는 기존 납품 중심 사업이 캐시카우 역할을 충분히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 유행 이후 원청기업 의존도가 높은 납품 사업의 한계를 체감하고 급변하는 외부 요인 대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하기 위해 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디자인 컨설팅을 통해 타사의 공기청정기와 차별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제품의 콘셉트를 정하고 고객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사이즈, 사용성을 높인 조작 방법, 쉽고 직관적인 상품가이드 구성 등 구체적인 제품 디자인 아이디어를 도출했다. 이후 디자인 개발 지원을 통해 기존 공기청정기가 해결하지 못하는 탈취와 유해물질 제거 능력이 뛰어난 '퍼스널 공기탈취기' 제작에 성공, 신시장 창출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이 디자인주도 제조혁신센터에서 지원받은 기업 대상으로 자체 분석한 결과 지원받은 기업의 국내 매출은 77% 증가하고 수혜기업은 상품화율을 75% 달성했다. 제품 사용성이 개선됐다고 응답한 기업도 89%에 달했다. 산업부와 디자인진흥원은 센터의 지원에 따라 유의미한 성과가 나타나는 만큼 디자인주도 제조혁신센터를 추가 구축할 계획이다. 지난 23일 대구성서산단에 신규센터가 구축됐으며, 새해 초에는 울산 미포산단에도 개소될 예정이다.

세계디자인기구(WDO)는 산업디자인을 '혁신적인 제품, 시스템, 서비스, 경험을 통해 혁신을 주도하고 비즈니스 성공을 구축하며 삶의 질을 향상하는 전략적 문제 해결 프로세스'라고 정의했다. 고객가치 형성에 필수적인 디자인은 제조기업이 신사업을 기획·추진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제해결 방법이다. 디자인이 제조산업에 드리워진 그늘을 걷어내는 효과적인 수단으로써 우리 제조업의 재도약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도록 디자인 분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윤상흠 한국디자인진흥원 원장 syoon@kidp.or.kr

〈필자〉

윤상흠 원장은 1991년 제35회 행정고시 합격 후 산업자원부 자원팀장, 지식경제부 무역구제정책과장, 산업통상자원부 통상협력총괄과장·무역조사실장 등을 역임했다. 통상·무역 분야 전문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 1조달러 달성에도 기여했다. 지난해 제17대 한국디자인진흥원장 취임 후 '현장에 답이 있다'는 철학에 기반해 디자인 전문기업 방문 등 현장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통상·무역 전문성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유망 디자인 기업의 해외 진출 지원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