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러-우크라 전쟁과 반도체 패권

[ET시론]러-우크라 전쟁과 반도체 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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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세계는 우크라이나가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패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측을 빗나갔다. 러시아가 예상외로 고전하며 우크라이나의 선전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예상치 못한 고전은 정치·경제·문화적 여러 이유가 있지만 반도체 공급망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부서진 러시아 탱크·미사일·공격헬기·레이다를 뒤지니 세탁기와 냉장고에 쓰는 저사양 가전용 반도체가 발견됐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러시아 미사일이 엉뚱한 곳에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최첨단 군사 장비가 저사양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군수산업을 지탱하는 24개의 핵심 기술이 인텔, 마벨, 마이크로칩, 브로드컴,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등 8개사의 미국 반도체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미국의 수출 규제로 정상적인 구매가 불가능해지자 러시아는 제3국 등 우회 경로나 암시장에서 반도체를 구하려 하고 있으나 이조차도 쉽지 않다. 반도체가 없으면 러시아의 최첨단 미사일·유도무기·방공무기·항공기 등 첨단무기를 제대로 유지·관리하고 생산할 수 없다. 구형 무전기에 의존하는 러시아의 통신은 실시간으로 우크라이나에 도청되고 있다. 반도체를 제대로 구하지 못하니 러시아는 냉장고, TV, 게임기 등을 닥치는 대로 분해해서 군사용 반도체를 찾아야 했다. 전쟁 초기에 첨단 유도 미사일 등을 사용하던 러시아는 최첨단 무기가 아닌 1960년대 재래 무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첨단기술이 전쟁 성패 좌우

미국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 옛 소련에 대한 반도체 등 첨단기술이 사용된 제품의 수출을 통제해 왔다. 2014년 크림전쟁 때 미국은 반도체 관련 전략물자 규제를 더 강화했다. 모스크바 인근의 반도체 팹에서는 최신 반도체 장비를 설치하던 유럽의 엔지니어들이 스패너까지 그대로 두고 서둘러 철수했다. 아마 그 비싼 반도체 장비들은 지금도 설치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은 30여개 국가와 협력해 반도체, 컴퓨터, 통신, 센서, 레이저, 해양, 항공우주 등 분야에서 강력한 러시아 수출 통제를 추가적으로 시행했다. 특히 첨단기술 제품과 부품에 대한 수출 통제는 러시아 군수산업에 이미 상당한 타격을 가했다. 러시아 미사일·전투기가 반도체가 없어 맥을 추지 못하고 있을 때 미국과 서방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는 군수용 반도체 의존도가 높고 가격은 싸지만 효율 좋은 무기로 러시아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다. 우크라이나는 개전 초기 미국에서 지원받은 대전차 미사일 재블린으로 러시아의 탱크부대를 손쉽게 무력화시켰다. 사거리가 수백㎞에 이르는 다연장로켓시스템 하이마스 등도 우크라이나가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우크라이나는 올겨울 지난 2014년 러시아에 빼앗긴 크림반도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정도다.

현대로템 K2 전차
현대로템 K2 전차

전략물자란 전쟁에 필요한 핵심 물자를 뜻한다. 인류 역사를 보면 전략물자 유무로 전쟁의 승패가 갈렸으며, 전략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도 수없이 발발했다. 시대와 기술 발전에 따라 전략물자는 계속 바뀌어 왔다. 신석기 시대에는 흑요석, 고대에는 철·말·낙타·활이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였지만 중세와 근대에는 화약의 재료인 질산칼륨, 20세기에는 석유와 석탄, 현재는 컴퓨터·알루미늄·우라늄·CNC공작기계·인공위성 등으로 변화해 왔다. 최근에는 반도체의 중요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미-중 패권 다툼이 격화하면서 반도체 중심으로 갈등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냉전시대이던 1980년대 미국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바닷속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핵미사일을 쏘는 소련 핵잠수함이었다. '바다의 트랙터'라 불릴 정도로 소음이 컸던 소련 잠수함이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추적이 어려워지자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원인을 조사해 보니 소련이 공산권 수출통제 품목인 일본 도시바의 다축CNC와 노르웨이산 콩스버그 수치제어장치를 몰래 수입해서 곡면이 많아 물방울을 적게 만들어 소음이 적은 잠수함 스크루 프로펠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사건으로 미국 하원의원들이 도시바 라디오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고, 결과적으로 일본 전자제품과 반도체 산업이 몰락하는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가 독자 개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15일 도산안창호함(3천t급)에 탑재돼 수중에서 발사되고 있다. 이날 발사시험은 국방과학연구소(ADD) 종합시험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와 군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뤄졌다. SLBM은 잠수함에서 은밀하게 운용할 수 있으므로 전략적 가치가 높은 전력으로 평가된다. 현재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인도 등 6개국만 운용하고 있는 무기체계로, 한국이 세계 7번째 SLBM 운용국이 됐다. 국방부 제공
우리나라가 독자 개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15일 도산안창호함(3천t급)에 탑재돼 수중에서 발사되고 있다. 이날 발사시험은 국방과학연구소(ADD) 종합시험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와 군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뤄졌다. SLBM은 잠수함에서 은밀하게 운용할 수 있으므로 전략적 가치가 높은 전력으로 평가된다. 현재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인도 등 6개국만 운용하고 있는 무기체계로, 한국이 세계 7번째 SLBM 운용국이 됐다. 국방부 제공

역사를 거슬러 고대와 중세에도 첨단무기를 갖추고 있는 나라가 세상을 지배했다. 철과 말을 잘 다루는 나라들이 제국을 건설했고, 전쟁터에서는 조금 더 앞선 전차와 마구가 승패를 좌우했다. 기원전 13세기에는 이집트와 히타이크가 카데시 전투에서 수천대의 전차로 전쟁하며 패권을 겨루었다. 스키타이부터 시작해 근대 이전까지 기마병의 위력은 현대 지상전의 탱크와 비슷했다. 중장기병이 시속 40~50㎞로 돌진해서 칼과 창으로 보병을 내리칠 때의 위력은 가공할 만했다. 흉노는 100분의 1 수준의 인구로도 중국 제국들과 대등하게 자웅을 겨루었고, 칭기즈칸은 불과 10만 안팎의 기병으로 유라시아 대제국을 건설했다. 고구려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금속제 등자는 8세기 유럽에 전해지며 기사 중심의 중세시대를 열었다.

예부터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 칭한 것은 우리의 뛰어난 활 역사를 보여 주는 증거다. 흔히 중국인은 창, 일본인은 칼을 잘 쓰고 한국인은 활을 잘 쏜다고 한다. 그런데 최고 성능의 활, 각궁을 만들려면 남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물소 뿔이 필요했다. 고려 무신정권의 최우는 물소 뿔을 구하기 위해 송나라 상인을 어르고 달래어 간신히 물소 4마리를 구했다. 조선시대에는 화약을 만드는 염초를 수입하는 게 국가 대사였다. 해금 정책을 하면서도 인삼을 수출해서 번 돈으로 염초를 수입했다.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은 압도적인 화포 성능으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연 것도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것도 대포 때문이었다.

필자는 사회생활 30여년 동안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중국의 굴기를 지켜봤다. 봉제산업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부터 시작해 철강, 화학, 조선, 전자 등 대부분 사업에서 중국이 세계적 생산능력과 기술을 보유하는 과정에 한국과 세계의 산업 생태계가 함께 격변해 왔다. 사실 세계는 중국이 낮은 인건비와 정부 지원으로 만들어 낸 싼 가격의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를 즐겨 왔다.

한국은 중간재를 수출하며 중국의 굴기에 가장 큰 혜택을 누렸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중국 바깥의 수많은 기업이 '주식회사 중국'과의 경쟁에 밀려 문을 닫았다. 불과 30년 만에 세계 공급망이 중국 중심으로 재구축된 것이다. 중국보다 앞서 서구와 일본의 기술을 배우고 도입한 한국도 세계화와 중국 굴기로 혜택을 크게 봤다. 한국은 어느덧 반도체, 이차전지, 자동차, 조선, 철강, 화학 등 세계 6위의 제조 역량을 보유한 나라가 됐다.

금융위기 이후 '일대일로' 등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중국에 대해 미국의 패권이 불안해지자 2018년 '미-중 무역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대부분 산업에서 중국은 무섭게 치고 올라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일부 영역에서는 앞서가기 시작했다.

[ET시론]러-우크라 전쟁과 반도체 패권

◇21세기의 최종병기 '활'은 반도체

어느 시대에나 첨단기술을 갖춘 자들이 시장과 세상을 지배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순풍이 지나가고 신냉전시대의 격랑이 몰아치기 시작하는 시대가 됐다. 30년 세계화 시대는 저물고 탈세계화 시대가 오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기술전쟁은 한쪽이 손들 때까지 앞으로도 수십년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미래의 모든 첨단산업은 반도체라는 산업의 쌀을 먹으면서 이뤄진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중국의 아킬레스건은 반도체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아야 세계 패권을 유지할 수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미-일 반도체 전쟁이 1990년대 초·중반대까지 십수년 지속된 사례를 보면 세계 경제와 산업을 주도할 4차 산업혁명 시대 중심에 있는 반도체 산업을 두고 벌어지는 미-중 무역전쟁은 앞으로도 수십년 지속될 것이다. 중국이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결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중국도 국가적 차원에서 반도체 장비의 국산화나 3차원 패키징 기술 등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하지만 서구가 수백년 동안 쌓아 올린 최첨단 기술의 공급망을 독자적으로 구축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만만치 않다.

미국과 중국의 고래 싸움에서 한반도를 지킬 수 있는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최첨단 반도체다. 우리 조상들이 물소 뿔을 수입해서 만든 세계 최고 성능의 최종병기 '활'로 한반도를 지켰듯이 21세기의 한반도를 지킬 수 있는 최종병기는 한반도에서 생산된 최첨단 반도체가 될 것이다.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bruce@surplusglobal.com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30년 동안 40여개국의 지구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수십억달러를 사고판 무역 일꾼이다. 2000년에 기업 전자상거래 회사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 반도체 중고 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해 '함께웃는재단'을 설립, 이사장직을 맡는 등 사회 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박람회(Austism Expo) 조직위원장직을 겸하고 있다. 서플러스글로벌은 2018년, 2022년 포브스 아시아 200대 유망 기업에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