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재계 신년사에서도 '디지털 혁신'이 빠지지 않았다. 디지털 혁신은 코로나19 이후 신년사나 기업 비전을 밝힐 때 단골 용어로 등장했다. 식품업계도 수년째 디지털전환(DX)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장에서의 디지털 혁신은 더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식품업계가 그동안 DX 성과라고 내놓는 것은 '자사 온라인몰 구축'이나 '디지털 마케팅' 정도에 불과하다.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디지털 혁신을 위해선 투자가 필수인데 가시적 성과를 내기 어려운 전사적 DX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계열사 간 기싸움도 있다. 정보기술(IT) 계열사에서 만든 솔루션을 적용해서 성과를 내면 해당 계열사의 공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적용하길 꺼린다는 얘기도 들린다. 밸류체인 전반에 걸쳐 DX가 이뤄져야 혁신이 가능하지만 이를 지휘하거나 조율할 기구가 없다는 점도 문제다. 실제로 DX 전담 조직을 갖춘 식품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빨라지는 온라인 소비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뒤늦게 자사몰을 꾸렸지만 치열한 온라인 경쟁에서 뒤처질 뿐이다. 이미 사용자환경(UI)·사용자경험(UX)을 완벽하게 갖춘 e커머스와의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물류 인프라가 필요한 빠른 배송력은 차치하더라도 상향평준화된 디지털 커머스의 편의성은 따라가지 못한다. 식품사의 최대 강점인 스테디셀러 제품으로 록인효과를 낼 수 있음에도 자사몰 매출 부진이 발목을 잡는 이유로 작용한다.
쿠팡·SSG닷컴·롯데온은 직배송 상품에 한해 단위 가격을 자발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단위 가격표시제는 판매가로는 가격 비교가 어려운 83개 품목에 대해 10g, 100g, 10㎖, 100㎖당 가격을 표시해야 한다. 현행법상으로는 온라인 쇼핑몰은 단위가격 표시 의무 사업자가 아니지만 이들 업체는 자발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상품의 용량이나 포장방법이 달라져도 단위 가격으로 제품 가격을 쉽게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요 식품업체 자사몰 가운데 단위 가격을 표시한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제조사가 자체 유통망을 구축하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자칫 유통사의 눈 밖에 난다면 판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테디셀러야 꾸준히 판매되겠지만 신제품을 내놨을 때 막강한 소비자를 보유한 유통사가 매대 한 구석을 내주지 않는다면 제품을 알릴 기회조차 잃을 수 있다. 따라서 대형 e커머스와 유통사 눈치를 보는 등 소극적으로 자사몰을 운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처지는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시대에 뒤처진 자사몰을 내놓고 DX 성공 사례로 포장하는 것은 오히려 자체 경쟁력을 깎아 내리는 역효과만 볼 뿐이다. 계묘년은 검은 토끼의 해다. 올 한 해는 대내외 경제의 불확실성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어려운 시기지만 식품업계가 토끼와 같은 재빠름과 슬기로 위기를 극복하길 바란다.
박효주기자 phj20@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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