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휴대폰과 자동차를 만들고 피겨스케이팅 챔피언 김연아와 박지성의 오른발과 왼발이 있는 나라다.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
약 14년 전 일일드라마 대사가 두고두고 회자된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한국산 장난감 총이 탐탁지 않은 외국인에게 지나치게 발끈한 탓이다. 애국심도 역시나 과유불급이다.
일주일 가까이 미국 라스베이거스 CES 2023 현장을 취재하며 기시감이 자꾸 피어올랐다. 세계적인 스마트폰과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도 대한민국 기업이 만든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부스는 각국에서 온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500여개에 가까운 우리나라 기업이 CES에 참가했다. 전체 기업 중 약 20%를 차지했다. 국내 기업이 CES 혁신상을 수상했다는 소식도 쏟아진다. 라스베이거스는 또 하나의 한국이었다. 기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현지인을 보고도 어깨가 으쓱했다.
하지만 CES 2023 현장에서 만난 중견·중소기업인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부심 역시 과유불급으로 느껴진다. 기술 혁신이 곧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탓이다. 스타트업 뉴빌리티는 멀티카메라 기반 자율주행로봇 '뉴비'로 CES 혁신상을 받았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도로교통법, 개인정보보호법, 공원녹지법 등에 가로막혀 자율주행로봇을 통한 배송사업을 펼칠 수 없다.
6일(현지시간)에는 최태원 SK 회장이 CES 2023 현장에서 한 컵을 다 비운 대체 유단백질 아이스크림이 관련 법이 완비되지 않아 수입에 최소 1년은 걸린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다. 아무리 혁신 제품이라도 국내에서는 제도 미비로 그림의 떡이다. 촌각을 다투는 정보기술(IT) 업계에서 1년은 너무 긴 시간이다.
해외에서는 주목받는 기술이 중소기업이란 이유로 대기업과 공급망 구축 논의조차 쉽지 않다는 하소연도 접했다. 국내 소재·부품 생태계에선 이젠 익숙한 목소리다.
'K-스타트업 전시관'을 비롯해 삼성전자 C랩, 서울대 전시관 등 국내 스타트업의 전시관은 대부분 유레카파크에 위치했다. 국내 굴지 대기업이 모인 라스베가스 컨벤션센터(LVCC)에서 도보로 30분 이상 걸리는 거리다. 대기업 C레벨 취재를 담당한 기자로서는 발걸음을 움직이기 쉽지 않다.
행사를 마치고 나니 아쉬움이 한가득이다. 한국에는 김연아와 박지성의 오른발과 왼발만 있는 것이 아니듯 CES에 한국 대기업만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정말로 세계가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않도록 힘을 합쳐야할 때다. 내년 CES 행사에서 또다시 혁신상 개수와 같이 숫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 보다 실질적인 성과가 창출되길 바란다. 정부 부처 고위관계자를 비롯해 많은 정치인과 기업인이 유레카파크를 찾았다. 산업 육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라스베이거스(미국)=송윤섭기자 sy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