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재정준칙 법제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ET시론] 재정준칙 법제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지난주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을 위한 FTSE Russel(WGBI 산출기관) 방문 및 투자설명회(IR)를 마친 후 영국 예산책임청 의장,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차장과 면담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코로나19 대응 등으로 확장한 재정정책 기조를 지난해부터 건전재정 기조로 전면 전환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진국과 국제기구는 코로나 이후 재정정책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국과 OECD의 방향성은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았다. 물가 상승 압력이 높고 코로나 대응으로 국가채무가 크게 늘어난 상황에서 재정을 더욱 풀기보다는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재정을 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실제로 영국은 최근 공공지출 축소계획을 발표하며 재정 건전화 노력을 강화하고 있었고, OECD도 회원국에 물가를 안정시키고 재정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재정정책 추진을 권고하던 상황이었다.

우리나라도 현재 물가 부담과 재정 부담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 위기 과정에서 이례적인 규모의 국가채무 증가로 재정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고 있다. 코로나 이전에 700조원 수준이던 국가채무는 2022년 1000조원을 훌쩍 넘기게 되면서 국가채무 비율이 국내총생산(GDP)의 50%에 육박하는 수준이 됐다.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도 매년 100조원 수준에 이르면서 이제 빚을 내어 재정을 운용한다는 말은 더 이상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게 됐다.

이처럼 재정 여건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는 현세대가 후손에게 빚만 물려주는 세대로 기억되지 않도록 다각적인 재정 건전화 노력을 펼치고 있다. 역대 최고 규모의 지출 구조 조정을 거쳐 2023년도 예산을 편성했고, 2026년까지 국가채무비율을 GDP의 50% 중반 이내로 관리하는 중기재정계획을 수립했다. 공공기관 예산·자산 효율화 계획도 마련해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건전화 노력에도 여전히 우리의 장기 재정 전망은 암울한 상황이다.

OECD는 구조개혁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우리나라 일반정부부채비율이 2060년 GDP의 140%를 초과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회예산정책처도 2060년 국민 1인당 부담해야 할 나랏빚이 1억원을 넘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구 감소가 명약관화한 상황에서 미래 세대 부담이 더욱 가중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재정 지속 가능성 확보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재정준칙 내용 요약(기재부 제공)
재정준칙 내용 요약(기재부 제공)
기재부 제공
기재부 제공

이러한 상황 인식 아래 정부는 지난해 9월 단순하면서도 구속력 있는 방향의 재정준칙 도입방안을 발표했다. 관리수지 적자 한도를 GDP의 3% 이내로 제한하되 국가채무비율이 60%를 초과하는 경우 적자 한도가 GDP의 2%로 축소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다만 재정준칙이 재정 역할을 제약하는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도록 경기침체·대량실업 등으로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재정준칙 적용을 면제할 수 있도록 예외 사유도 규정했다. 다시 말해 평상시에는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도록 하되 위기 시에는 재정준칙으로 축적한 재정 여력을 활용해 재정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물론 재정준칙 도입이 재정 건전성을 위한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러나 '재정 안전벨트'로 비유되는 것처럼 재정준칙은 재정적자나 국가채무가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도록 안전망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IMF에서는 1970~2018년 55개국을 분석한 결과 재정준칙을 도입한 국가에서 재정적자가 개선됐다는 연구 결과를 내기도 했다.

재정준칙은 재정수지에 한도를 정해서 국가채무 증가를 억제함으로써 재정 건전성을 회복시키는 효과도 있지만 실물경제에도 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재정준칙이 도입될 경우 재정적자와 국가채무비율이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운용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대외신인도가 높아질 수 있다.

이는 해외 투자자에게 발행하는 국채(외국환평형기금채권)의 금리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기업이 더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한다. 재정준칙이 우리 기업의 이자 부담 완화를 통해 실물경제 개선에도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정부는 재정준칙이 단순히 선언적인 규정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준수될 수 있도록 보완 장치도 마련하고 있다. 국가채무와 재정수지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지표를 발굴해서 상시적으로 모니터링, 재정 위험 요인을 사전에 점검·분석하고 관리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재정관리체계(Sustainable Fiscal Management Framework)를 구축할 계획이다.

건전재정기조로의 전환은 우리 정부만 외치는 것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지금은 재정 여력(fiscal buffer)을 회복해야 할 시기이며, 물가 상승과 부채 대응을 위해 재정적자를 감축할 것을 강조했다.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은 올해부터 재정적자 규모를 점차 줄여 나가는 방향의 예산안을 내놓으면서 건전재정 기조를 공고히 하고 있다.

현재 피치·무디스 등 국제신용평가사와 OECD, IMF 등 국제기구는 우리나라의 재정준칙 법제화 여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법적 근거를 갖추는 것은 재정준칙의 신뢰성 확보에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난 정기국회에서 처리하지 못한 법안을 논의·의결하는 2월 임시국회는 재정준칙 법제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미래세대를 위해 건전한 재정을 물려주자는 데에는 여야를 떠나 이견이 있을 수 없는 명제이다. 재정준칙 법제화를 위한 국회의 대승적 결단을 기대한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고 한다. 국가채무가 빠르게 증대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건전재정과 재정투자의 효과성을 위해 고등·평생교육지원특별회계를 신설했으며, 재정준칙 법제화를 추진하고, 중장기 재정제도 혁신을 위한 재정비전 수립 작업을 하고 있다. 임시국회에서의 재정준칙 법제화를 토대로 재정이 좀 더 밝은 미래를 뒷받침할 자양분이 되기를 희망한다.

최상대 기획재정부 2차관

〈필자〉최상대 차관은 1965년생으로,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메릴랜드대에서 공공정책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행시 34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기획재정부 예산총괄과장,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실 행정관, 세계은행(WB) 선임 이코노미스트, 재정혁신국장·예산총괄심의관·예산실장 등 예산·재정 분야 요직을 거쳐 2022년 5월 기획재정부 제2차관에 임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