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위기를 언급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그럼에도 인문학의 불편한 진실 담론을 피해 갈 수는 없다. 4차 산업혁명 가속화로 산업 구조가 개편되고, 그에 따른 고등교육 현장이 급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문학 위기를 진단할 수 있는 지표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입시 경쟁률에서 인문계열은 자연계열에 비해 낮아지고 있다. 올해 입시의 경우 인문계 교차 지원이 가능해짐에 따라 주요 대학 경쟁률에서 인문계열이 자연계열보다 조금 높게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 주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문계열 선호도가 낮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문계열 중심 대학은 입시 정책을 세우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문계열로 진학한 학생은 대학 생활에서 진로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인문계열 전공 교수들은 학생 진로 상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학생은 전공에 맞는 일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은 취업률에서 나타난다. 지난 10년 동안 인문계열 취업률은 15% 이상 낮아졌으며, 전체 취업률에 비해서도 10% 이상 낮은 수치를 보여 준다. 의학계열과 공학계열 취업률은 평균 이상의 성적을 보여 주고 있지만 인문계열 취업률은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문계열 전공은 늘 구조조정 대상이 되고 있다. 입학 자원 감소에 따른 지방대학 위기로 전공 통폐합이 가속화되고 있다. 주요 대상은 인문 및 사회계열에 속해 있다. 공학계열 경우에도 통폐합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분야에서는 새로운 전공이 지속적으로 추가되고 있기 때문에 인문계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에 직면한 인문학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해야 할까. 사실 새 천년에 진입하면서 세계적으로 유수한 몇몇 대학은 위기를 진단하고 궁극적 대책을 수립하는 등 새로운 기회를 창출했다. 그런 대책의 핵심은 교양대학을 강화해서 인문학을 학제 간 교육과정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통찰력에 따르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기술인본주의가 순수인본주의를 대체했음에도 '문사철'(문학·사학·철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이유는 기술적 하드웨어에는 반드시 콘텐츠 기반의 소프트 파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프트 파워는 인문학적 기반의 콘텐츠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그런 콘텐츠 개발은 첨단 기기 개발 못지 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기술인본주의가 가속될수록 대학 교육에서 인문학은 또 다른 경쟁력을 지니게 된다.
다만 그것이 지금과 같은 독립된 전공 또는 학과 방식으로 존재하기는 어렵다. 모든 교육 분야에서 혁신이 요구되고 있듯 인문학 분야에서도 혁신이 필요하다. 그것은 독립된 전공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학제 간 교육과정으로 변혁하는 것이다. 이 담론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일본의 국제교양대학이나 미국의 애리조나주립대 사례를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다. 인문학자들은 교육과정의 변혁이라는 불편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최근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12대 신산업 분야의 100대 핵심 기술 목록을 보고 있으면 인문학자로서 또 다른 불편함을 느낀다. 그것은 대부분 하드 파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소프트 파워를 무시할 수는 없다. 자동차·휴대폰·반도체 못지 않게 영화·음악·웹툰을 무시할 수 없다. 이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소프트 파워는 유효하며, 그것은 인문학을 기반으로 하는 창조성이 요구된다. 따라서 인문학은 이제 불편한 진실을 넘어 그 창조성의 기회를 구현하기 위해 혁신해야 하며, 이에 대한 대학 차원의 담론 주체가 구성되기를 제안한다.
이국헌 삼육대 교수, 전 기획처장, khlee@sy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