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셀러레이터(창업기획자) 업계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활동 중인 액셀러레이터 수가 400개사를 넘어섰다. 총 투자금액도 4600억원을 돌파했다. 액셀러레이터가 지난해 발굴한 스타트업만도 2000개사에 육박한다. 본계정 투자에 치중했던 투자 방식도 벤처투자조합을 통한 간접투자로 바뀌면서 일부 유망 액셀러레이터를 중심으로 대형화하는 추세다.
초기창업 투자생태계에서 액셀러레이터 역할이 점차 커지고 있지만 정작 관련 제도와 투자 환경은 빠른 성장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업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액셀러레이터가 상장 과정에서 고배를 마시는가 하면 모태펀드 출자, 투자조합 수탁 거부 사태 등에서도 액셀러레이터는 벤처캐피털(VC)과 차별당한다. 빠르게 초기투자 시장의 근간으로 성장한 액셀러레이터에 대한 체계적 지원과 관리 필요성이 요구된다.
◇양적 증가, 질적 변화 함께 이룬 액셀러레이터
9일 액셀러레이터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시장에서 활동 중인 액셀러레이터 417개사가 총 4664억원을 투자했다. 지난해 3698억원에 비해 26.3% 증가했다. 지난해 전체 벤처투자가 11.9%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액셀러레이터는 오히려 투자를 늘렸다.
창업 3년 미만 초기기업에 대한 투자도 활발하다. 지난해 액셀러레이터의 초기투자는 3196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18% 증가했다. 지난해 벤처투자업계 초기투자 증가액 7.8%와 비교하면 증가폭 차이가 크다. 지난해 액셀러레이터가 투자한 초기기업 수는 총 1445개사, 전체 투자기업 수는 1961개사에 이른다.
투자 혹한기로 접어들면서 지난해 벤처투자업계 전반이 투자를 줄인 가운데서도 액셀러레이터 투자는 지속 증가했다. 특히 처음으로 2조원대를 넘어선 초기투자 성과는 액셀러레이터의 스타트업 발굴·육성 기능이 활성화된 결과라는 해석도 나온다.
액셀러레이터의 양적 증가와 함께 질적 변화도 이뤄지고 있다. 과거 초기투자 대부분을 자기자본으로 수행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대·중견기업 등 전략목적(SI) 외부투자자와 공동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보육프로그램을 공동 기획하는 것은 물론 연계 투자를 위한 벤처투자조합 결성도 잇따르고 있다.
실제 2020년 벤처투자촉진법 제정 안팎으로 액셀러레이터의 벤처투자조합 결성이 가능해지면서 상당수 투자가 본계정 투자가 아닌 벤처투자조합을 통한 투자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액셀러레이터가 주로 활용하던 간접투자방식인 개인투자조합보다도 벤처투자조합을 통한 투자가 더 많았다.
지난해 기준 액셀러레이터의 본계정 투자는 308억원인 반면에 벤처투자조합을 통한 투자 집행은 2298억원에 이른다. 본계정 투자는 전년 대비 40.9%가 감소했고, 벤처투자조합 투자는 2배가 넘게 증가했다. 전체 액셀러레이터 투자에서 벤처투자조합이 차지하는 비중도 50%에 육박한다. 개인투자조합 투자는 2058억원으로 전년과 유사한 수준을 기록했다.
신진오 액셀러레이터협회장은 “창업기획자 제도가 2017년 처음 도입된 이후 업계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면서 “초기투자생태계에서 액셀러레이터 역할도 앞으로 점차 커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장에도 지원체계 공백…“액셀러레이터 특성 살린 정책 마련해야”
액셀러레이터 업계가 성장을 거듭하고 있지만 법·제도 기반은 물론이고, 지원 및 관리·감독 체계는 여전히 미흡하다. 벤처투자촉진법 제정 이후 액셀러레이터가 등록을 대거 말소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법에서 액셀러레이터가 사모펀드(PEF)를 결성할 수 없도록 규정하면서 액셀러레이터를 겸업하는 VC들이 대거 라이선스를 반납하는 사태가 불거졌다.
지난해까지 계속됐던 금융권의 벤처투자조합 수탁 거부 사태도 마찬가지다. 올초 중소벤처기업부가 벤처투자조합 수탁업무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내놨지만, 액셀러레이터는 여전히 조합 결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VC 대비 영세한 액셀러레이터 특성상 대형 조합을 결성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다.
2021년까지만해도 액셀러레이터의 벤처투자조합 결성은 4991억원에 달했다. 전년 대비 약 5배 가까이 결성이 늘었다. 반면 금융권 수탁거부가 본격화한 지난해 결성 규모는 4331억원으로 외려 감소했다. 금융권 수탁 거부로 인해 50억 미만 투자조합 결성이 크게 감소한 영향이다. 벤처투자조합을 통한 투자가 증가하고 있지만, 결성은 오히려 줄어드는 역설이 발생했다.
액셀러레이터업계 관계자는 “최근 펀드 결성이 감소세에 접어들면서 수탁은행 이슈는 다소 잠잠해지긴 했지만, 금융기관 관점에서는 소규모 펀드 수탁을 꺼릴 수밖에 없다”면서 “수탁 없이 운용할 수 있는 조합 규모를 현 20억원에서 50억원까지 확대하거나 법을 개정하는 등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지원 사업 역시 지나치게 VC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도 액셀러레이터 업계 불만이다. 보육기관을 별도로 운영해야 하는 액셀러레이터 특성상 VC 대비 인력 확보와 임대료 등 추가 고정비용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우수기업에 대한 이렇다 할 지원이 없는 것이 업계의 대표적인 불만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260억원 규모로 이뤄졌던 모태펀드의 창업기획자 전용펀드 출자 사업도 올해 들어 자취를 감추는 등 차별을 받는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투자와 보육이라는 주요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물론 본계정 투자부터 개인투자조합, 벤처투자조합을 통한 투자 방식까지 겹치면서 업계 내부의 체계적인 위험 관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는 업계가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신진오 회장은 “창업기획자 제도의 시작이 법인형 엔젤 또는 소규모 VC와 같은 개념에서 시작된 만큼 보육 기능과 초기투자를 함께 수행하는 액셀러레이터 특성을 완전히 반영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서 “현재로서는 기존 법에 맞춰서 운영되고 있지만 향후 법 개정 등을 통해 액셀러레이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숙제”라고 말했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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