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엔 업무환경 변화로 직장을 잃는 일이 많다. 가족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체코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보자.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유일한 사람이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니 끔찍한 벌레로 바뀌어 있었다. 가족은 처음엔 그를 걱정한다. 생계를 위해 각자 일을 구하고, 어렵고 힘든 삶이 이어진다. 서서히 그를 귀찮아하고, 혐오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짜증 난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가족은 안도한다.
그는 가족을 위해 일하다 이유없이 노동력을 상실했고 버려졌고 죽었다.
그가 변신한 것일까, 그를 버린 가족이 변신한 것일까.
또 하나. 이란 작가 도리스 레싱의 작품 '다섯째 아이'가 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첫눈에 반해 결혼한다. 큰 집을 사고, 많은 아이가 있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로 한다. 그러나 경제력과 양육 능력이 없다. 큰 집을 사는 데 데이비드 아버지의 지원을 받고, 아이를 기르는 데 해리엇 어머니의 도움을 받는다. 넷째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반대를 무릅쓰고 다섯째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는 폭력적이고 다른 형제와 반목, 가족을 공포에 떨게 한다. 요양원에 맡겼다가 다시 데려온다. 가족은 돌아온 다섯째 아이로 말미암아 분열된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 아이는 가출, 범죄자가 된다. 이 가족의 문제는 무엇일까.
디지털은 자본주의 순기능만 아니라 역기능도 가속한다. 빚과 생계 위협으로 극단을 선택하는 가족이 있다. 경제력은 가족 유지에 중요하다.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렇다고 경제력만으로 가족을 지킬 수 없다. 권력과 부가 있는 사람도 가족 문제로 고통스러워한다. 가족을 지키려고, 가족의 미래를 위해 법을 위반하기도 한다. 원수만도 못한 가족도 있다.
가족은 위험과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를 지켜줄 마지막 생존 인프라다. 그렇다고 가족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불법적 일을 할 수는 없다. 다른 가족이나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한다면 부메랑이 되어 내 가족을 해친다. 가족이 가장이나 특정 가족만을 위한 공동체여도 안 된다. 경제적 공동체에 그쳐서도 안 된다. 가족 구성원이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리 취급해서도 안 된다. 가족이라고 착취해선 안 되고, 무조건 희생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가족이 혈연으로 구성될 필요도 없다. 입양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도 가능하다. 쉽게 만들고 해체할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니다. 가족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기여를 많이 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경제력 등 문제 해결을 외부에 의존하는 가족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가족의 노력에도 천재지변, 경기침체 등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해결되지 못한다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
라면을 끓인다고 생각해 보자. 적당한 크기의 면, 깨끗한 물 적당량, 분말수프와 다양한 채소 등이 곁들여져야 한다. 어느 하나 너무 많아도 안 되고, 너무 적어도 안 된다. 라면을 끓이는 사람이 정성을 들여야 한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적당한 경제력에 사랑·신뢰·소통이 있어야 한다. 사회생활에 지친 마음과 몸을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사랑·신뢰·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운동화를 사 주셨다. 품에 안고 집에 가는 길에 개천을 건너다 한 짝을 빠뜨렸다. 약이 오른 나는 짜증을 내며 나머지 한 짝도 개천에 던져 버렸다. 친척들은 성정이 고약한 놈이라고 나무랐다. 할머니만이 운동화가 제 짝을 찾아 떠났으니 잘했다고 웃으셨다. 아무도 모르게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배웠다. 그런 것이 가족 아닐까.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역경을 이겨 낼 수 있는 의지가 되는 가족. 그것만이 디지털 시대를 건너기 위한 필수 가치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혁신과 공존의 신세계 디지털'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