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달,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서 충격적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이 미국 메모리반도체 제조사 마이크론을 대상으로 자국 내 판매를 규제하면, 그 공백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메워서는 안 된다고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는 뉴스였다. 메모리반도체 제품의 대(對) 중국 판매 제한은 우리나라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종의 레드라인이었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반도체 제재는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미국은 지난 해 10월 반도체 제조 관련 대중국 수출 통제 조치를 발표했다. 올해 1월에는 일본·네덜란드와 반도체 제조 장비의 중국 수출규제에 나섰다. 중국이 스스로 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데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FT 보도가 사실이라면 미국은 한국에도 중국에 대한 직접 제재 동참을 요구하고 있다. 대 중국 반도체 제조장비 규제와 ‘반도체법’ 가드레일 세부 규정 때문에 한국 기업의 중국 사업 불확실성이 높아진 가운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미·중간 불꽃 튀는 ‘tit for tat(앙갚음)’ 과정에 한국이 참전하면 우리나라의 약한 고리인 공급망에 불똥이 튀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우리나라는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다양한 공급망 문제를 겪었다. 공급망 문제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요한 첨단소재부터 와이어링하네스와 같은 부품, 그리고 요소수 등 원료까지 업종과 가치사슬을 가리지 않는다.
글로벌 분업체계에 깊게 편입된 우리나라 산업·통상 구조로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호되게 공급망 문제를 겪으면서 촘촘한 대응체계를 구축한 것은 다행이다. 특히, 요소수 사태 이후 공급망 문제를 ‘경제안보’ 차원으로 간주하고 공급망 취약 품목 4000여개를 모니터링하고 200여개 경제안보품목에 대한 범정부적 집중 관리체계를 구축한 것은 신속하고 적확한 조치였다.
하지만 아무리 촘촘하게 사전 징후를 감지해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얼마 전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대만을 떠난 직후 중국이 모래에 대한 수출 통제에 나선 것이 대표 사례다. 그래서 조기 회복력이 중요하다. 정부는 국가 안보, 국민생존·생활, 산업 경쟁력에 필수적 공급망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신속히 개입해 충격을 흡수해야 한다.
‘공급망관리기본법’(제정),‘자원안보특별법’(제정), ‘소부장 특별법’(개정)을 통칭하는 공급망 3법은 우리나라가 5년여간 다양한 공급망 충격을 겪으며 축적한 경험과 교훈의 산물이다. 여러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공급망 안정화에 필요한 정책 수단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정부와 기업이 해야 할 의무를 담았다. 민간의 공급망 안정화 노력을 정부가 적극 지원하도록 공급망 안정화 기금 등 재정적 기반도 공급망 3법을 통해 갖출 계획이다.
물론 공급망 3법이 모든 공급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버티고 대응할 수 있는 근간이 될 수 있다.
한·중은 윤석렬 대통령의 방미기간을 전후로 그 어느 때보다 거센 설전을 주고 받았다. 뜨거운 공방만큼 중국과 연결된 우리나라 공급망도 살얼음판이다. 공급망에 대한 민·관의 관심이 수그러진 지금, 다시 한번 공급망 대응체계를 점검하고 전열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시작은 공급망 3법이다.
이준 산업연구원 산업정책연구본부장 jlee@kie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