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벤처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오르는 성장사다리 ‘혁신조달’

이종욱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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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자율주행차 실증에 성공한 나라는 어디일까? 대부분 구글과 테슬라를 떠올리며 미국이라 생각한다. 오답이다. 정답은 대한민국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0년 전인 1993년 고려대 한민홍 교수팀이 경부고속도로에서 레벨 2~3단계 수준 자율주행기술 실증에 성공한다. 놀랍게도 구글의 웨이모나 테슬라가 태어나기도 전에 자율주행차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 자율주행차는 왜 멈춰버렸을까? 그 이유에 대해 TV에 출연한 한민홍 교수는 자율주행차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혁신적이어서 속된 말로 ‘돈이 되지 않아’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가의 도전과 꿈을 품을 수 있는 사회적 지원체계가 부재했던 것이다. 당시 개도국인 정부 입장에서 단기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기술개발에 지원을 집중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우리 기업이 자율주행 분야에서 가장 선도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던 기회는 그렇게 물거품이 됐다.

그렇다면 현재 미국이 자율주행차의 선두주자가 된 비결은 뭘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 기술수준은 우리나라는 물론 프랑스나 독일에도 뒤처져 있었다. 자율주행기술 추격자였던 미국을 선도자 지위로 전환시킨 주역으로 구글X의 설립자이자 스탠포드대학 교수인 세바스찬 스런(Sebastian Thrun)이 꼽힌다. 결정적 계기는 그가 2005년 연방정부 기관인 국방고등연구계획국(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에서 개최하는 신기술공모전에서 자율주행기술을 탑재한 차를 개발, 227㎞ 구간의 모하비 사막을 완주해 우승을 거머쥐면서 부터다. 미국 국방부 등 연방정부는 민간의 자율주행기술에 지속적으로 연구개발비를 투입하고 민간 수요가 요원한 상황에서도 공공구매를 통해 상용화까지 지원했다. 기업가의 도전·모험적 혁신과 그 중요성을 꿰뚫어본 정부의 지원정책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미국을 세계 최고의 자율주행기술 보유국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우리 경제는 짧은 기간에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개도국에서 선진국 지위에 올랐으며 산업구조도 지식·정보산업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됐다. 과거와 같은 정부 주도 전략으로는 고도화된 우리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없게 됐다. 현 정부가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역동적 경제’를 국정운영의 핵심전략으로 세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혁신의 주체는 민간이 돼야 하며, 정부는 민간시장의 역동성이 제고·유지되도록 혁신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체계 마련과 공정한 시장관리자로서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을 개발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판로가 보장되는 상황과 판로 확보가 불확실한 반대의 상황은 동기 부여의 강도나 연구개발의 완성도 측면에서 차이가 클 수 밖에 없다. 연간 196조원 이르는 우리나라 전체 공공구매 중 기술개발제품 구매에 활용되는 규모는 약 7조원에 이른다. 정부는 기업의 연구개발을 활성화하고자 우선구매제도나 구매목표제 등 기술개발제품 구매촉진 제도를 운영 중이다.

[ET시론] 벤처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오르는 성장사다리 ‘혁신조달’

특히 기재부, 산업부, 중기부, 조달청 등 범정부적으로 추진 중인 혁신조달 제도는 단순한 기술개발을 넘어 새로운 공공수요를 창출하고, 공공부문에 선도적·전략적 구매를 통해 시장에 없는 새로운 혁신제품 개발을 유도하며, 궁극적으로 공공문제 해결, 행정서비스 개선 등 공적 가치 실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다른 기술개발제품과 차별성을 가진다. 정부가 공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초 질문을 던지고 민간이 자유로운 기술 경쟁을 통해 해결책(혁신제품)을 찾고, 정부가 혁신제품의 첫 구매자가 되는 선진 조달방식이다. 2019년 도입된 혁신조달제도가 시행된 지 4년 만에 혁신제품 공공구매액은 1조원을 넘었다. ‘CES 2023’에서 15개 혁신제품이 혁신상을 수상했으며, 2개 제품은 최고혁신상의 영예를 안았다. 혁신제품은 우크라이나에 구호품으로도 공급된다. 짧은 기간이지만 혁신조달제도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혁신조달제도는 기술 발전 뿐만 공공서비스 개선에도 기여를 하고 있다. 혁신제품은 기술만 좋은 제품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가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혁신적으로 풀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진 제품이다. ‘CES 2023’에서 가장 주목받은 제품은 미국 농기계 전문업체인 존디어가 개발한 완전자율주행 트랙터였다고 한다. 존디어는 농촌의 노동력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율주행 트랙터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혁신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존디어의 자율주행 트랙터와 우리의 혁신제품은 공통 분모를 가진다. 대표적인 예로 조달시장에서 큰 호응을 받고 있는 혁신제품인 ‘바닥 신호등’은 기존 신호등의 고정관념을 깬 발상의 전환으로 스몸비(Smombi·스마트폰을 보면서 길을 걷는 사람)로 인한 보행자 교통사고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미국의 유명한 우주왕복선 기업, 세계적인 노트북 기업이 미국 정부의 공공구매정책 덕분에 기술개발 직후 본격적인 상용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기존 기술로는 대응이 어려운 공공문제를 해결하는 혁신적 기술·제품에 대한 적극적 구매정책은 20~30년 후 미래 우리 경제의 주인공이 될 기업을 키우는 현재의 투자다. 점자 기반의 시각장애인용 스마트기기 벤처기업, AI기술이 접목된 내시경 시스템 창업기업 등 정부 지원을 통해 초기 판로기반만 마련되면 성장 가능성이 높은 혁신기업은 많다.

조달청은 혁신기업의 꿈을 사고파는 ‘혁신장터’를 통해 혁신제품의 공공판로 확산에 앞장서고 있으며 연간 500억 원의 시범구매 예산을 활용해 많은 혁신기업에 실증기회까지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코이카, 코트라 등 해외현지법인을 활용한 해외실증사업도 추진해 혁신기업의 수출기반 확보에도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많은 혁신기업이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 하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30년 전 세계 최초로 개발되고도 멈춰 버린 자율주행차의 전철을 다시는 밟지 말아야 한다.

이종욱 조달청장

〈필자〉이종욱 조달청장은 1965년생으로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행정고시 35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기획재정부 교육과학예산과장, 국토해양예산과장, 장기전략국장, 국고국장, 국민경제자문회의 지원단장, 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쳤다. 국채시장 안정을 위해 2년물 도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등 개인투자용 국채 도입방안을 마련했다. 경제정책 전반에 폭넓은 안목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조달청장 취임 이후 경제위기극복과 경제활력회복을 위한 지원을 강화하고 현장 규제개선에 힘써왔다. 규제개혁이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혁신조달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