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22대 총선에 적용할 선거법에 대한 개정논의가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분위기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최후통첩처럼 여야 지도부에 합의시한으로 제시한 7월 15일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필자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김 의장이 가이드라인으로 설정한 시한이 이미 네 번째다.
물론 그동안 논의에 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회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가 초당적으로 선거법 개정을 추진하는 모임을 결성했고, 여기에 전체 의원 절반 정도가 가입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선거법 개정을 통한 정치의 정상화에 국회의원 자신들도 얼마나 목말랐던가를 보여주는 증표였다.
초당적 모임이 뒤에서 밀고,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앞에서 끌어 헌정사상 두 번째로 전원위원회가 소집됐다. 정치적 의미로서는 사실상 첫 번째 전원위원회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여기서 나흘 동안 여야 국회의원들이 차례로 발언대에 올라 선거법 개정을 통한 정치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 각자의 소신을 설파하고, 구체적 방법론에 대해서도 다양한 대안을 제시했다.
전원위원회의 성과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나흘 동안 본회의장에서 토론을 지켜본 필자의 시각에서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사안마다 여야가 나뉘어서 당파적 대립을 계속해온 국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정치개혁의 당위성과 절박성에 대해서 한 목소리가 나왔다. 정당을 떠난 개인적 소신들이 자유롭고 다양하게 펼쳐졌다. 겉으로는 무심한 것 같아도 의원 개개인이 정치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 얼마가 절실하게 고민해왔는지 확인되는 자리였다.
선거제도의 개편방안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대안제시가 이루어졌다. 같은 당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 발표되고, 다른 당 의원끼리 같은 내용이 발표되기도 했다. 이 모두가 정파적 정쟁으로 일관해온 국회에서는 처음 목격되는 낯선 풍경이면서, 정치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갖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까지가 전부였다는 점이다. 전원위원회 이후 논의의 진전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답보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토론에서 표출된 각종 대안을 가지고 정개특위를 중심으로 선거구제 개편에 대한 후속 심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전원위원회 후 정개특위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정체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 여야 원내지도부 모임, 2+2 모임 등이 시도됐지만, 의미있는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선거법 개정 논의를 추동해온 김 국회의장이 여러 차례 여야 지도부에 종용하고 전체 의원들에게 친전을 보내 진행을 촉구하기도 했지만 별 반응이 없이 시간만 지나가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핵심적 요인은 개혁의 대상인 파행 정치가 개혁의 주체인 선거법 개정 동력을 누르고 있는 현실의 역학관계에 있다. 승자독식 구조로 인한 파행 정치를 혁파하기 위해 선거법 개정을 논의하고 있지만, 실상은 여전히 승자독식 구조가 현실을 지배하면서 정치의 파탄을 존속시키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합의에 의한 선거법 개정을 기대하는 것이 연목구어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거법 개정의 열쇠를 쥐고 있는 여야 지도부의 최대 관심사가 정치개혁이라는 이상보다 내년 선거에서의 승패와 그에 관련된 선거법의 제도적 유불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다. 총선 결과에 소속 정당은 물론 개인의 정치적 생사가 걸린 여야 지도부 입장에서는 선거제도의 설계에 따른 유불리가 불투명한 현 시점에서 특정 선거제도에 대해 합의해주는 것은 정치적 도박일 수 밖에 없다.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유불리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연말까지 합의를 미룰 수밖에 없는 고충이 있는 것이다.
이런 교착적 상황에서 선거법 논의의 돌파구를 만들어내야 할 초당모임도 구조적 한계에 발이 묶이고 있다. 선거법 개정을 위해서 모였을 때는 초당적이고 대승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소속 의원들이 정치적 이슈의 현장에서는 소속 당파의 전위에서 대립, 갈등을 증폭시키는 행동대 역할을 하는 이중적 모습 때문이다. 지난한 선거법 개정 작업에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선거법 논의의 장에서는 물론이고 현실 정치의 이슈 현장에서 정치개혁의 의지를 몸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현실은 그 반대이기 때문에 동력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선거법 개정을 통한 정치개혁이 가능한가 아닌가는 의원 개개인의 결단에 달렸다. 애초에 선거법 개정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의원들은 논외로 하고, 그 필요성을 절감해 초당모임까지 만든 의원들은 말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상대당에 존중과 배려, 경청과 소통, 대화와 타협, 양보와 절충을 통한 합의의 정치를 몸으로 실천해 보여야 한다. 그럴 때 여야 지도부도 총선에서의 승패와 무관하게 상생공존의 정치, 토론과 합의의 정치가 가능함을 확인하고, 선거 승패와 그에 관련된 선거제도의 유불리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정치적 유불리보다 정치개혁의 필요성에 더 무게를 두고 선거법 개정 논의를 진척시키고, 의미있는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여야 의원들, 특히 초당적 의원들이 개혁정치의 실천을 통해서 여야 지도부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줄 때만 선거법 개정논의의 후속작업의 진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대 국회마다 선거를 앞둔 정기국회가 혈투의 전초전이 됐던 선례를 감안할 때, 그 전철을 또 밟느냐 아니면 혁명적 변화가 시도되느냐를 두고, 정치개혁에 대한 의원들의 의지와 진정성이 곧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 chohaejin0804@naver.com
〈필자〉조해진 의원은 국민의힘 소속 3선으로, 경남 밀양 출신이다. 서울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박찬종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해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보좌역과 이명박 서울시장 비서관, 이명박 대통령당선인 부대변인을 거쳐 여의도에 입성했다. 기획재정위, 정보위,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소속이며, 국회 ESG 포럼 공동대표를 역임하며, ESG가 우리 경제와 공공영역에 더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더 빠르게 확산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