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한 교수의 정보의료·디지털 사피엔스]DNA와 밈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

어느 날 바퀴벌레 한 마리가 당신의 눈에 띄인다. 바퀴벌레는 그 한 마리뿐이었을까? 그럴 리가…. 당신의 머리 속엔 이미 수백 마리 바퀴벌레가 그려져 있을 것이다. 눈에 띈 바퀴벌레 한 마리는 어떻게 머리 속 수백 마리 바퀴벌레를 만들어낸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눈에 띄는 것을 욕망한다. 우리의 눈에 띈다는 것은 그것이 흔치 않은 무엇이거나, 그것이 무의미한 평형상태를 뜻하는 '무질서함'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무언가 새로운 질서, 규칙, 혹은 패턴을 가졌다. 그래서 우리의 눈과 귀를 확 사로잡고 우리에게 높은 정보량을 제공하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의 눈에 확 띄는 것들에 집착하고 욕망한다.

어느 날 우리의 눈에 띈 규칙 혹은 패턴은 낮은 확률을 뚫고 어렵게 발생한 것이므로, 그와 비슷한 확률을 가진 다른 수많은 가능성에 비해 꽤 높은 발생확률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본 한 마리는 적어도 수백 마리를 암시한다. 어떤 패턴이 '익숙한 평형상태'를 뚫고 우리의 눈에 뜨인다면, 그 패턴은 '새로운 평형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도처에 반복출현하며, 모방되거나 복제되거나 스스로를 자기복제할 것이다. 생명과 문화의 평형상태는 '유전'과 '밈'으로 유지된다. 한 평형상태가 새로운 평형상태를 찾아 이동할 때 균열은 피할 수 없고 그 균열의 갈증은 새로운 '유전'과 '밈'의 출현을 애타게 찾는다.

'베르테르 효과'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섬세하게 묘사된 슬픈 사랑과 베르테르의 권총 자살에 매료된 250년 전의 젊은 청년들 사이에 유행처럼 퍼져간 모방자살의 '사회적 밈'이었다. 청년들은 베르테르의 푸른 연미복과 노란 조끼를 입고 자살을 시도했다. 최근 온 국민을 불안하게 한 '묻지마 칼부림' 사건을 유행처럼 흉내낸 '묻지마 칼부림 예고' 소동도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이 감지한 불안을 통해 퍼지는 '사회적 밈'의 하나다.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창작과 표절과 복제가 구분되지 않는 혼돈의 '대표절 시대'다. 우리는 매일 어제를 복제하며 일상을 반복한다. 인공지능은 노엄 촘스키 교수의 지적처럼 '첨단 표절기계'고, 이는 우리들 자신의 원숭이처럼 흉내내고 따라 하는 모방 본능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도 문명도 모방으로 시작되어 독창성을 찾아간다. 고흐는 그가 존경한 밀레의 작품을 모방했고 '롯데그룹'의 명칭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크게 감동한 청년 사업가 신격호가 베르테르가 사랑한 여주인공 샤를로테의 이름에서 따왔다. 롯데월드타워엔 괴테의 동상이 세워졌다.

'베르테르 효과'의 모방자살이 250년 전의 근대화 과정에서 '감정'과 '이성'의 대립, '개인적 감성'과 '집단적 획일화', 나아가 '인간의 개인성'의 발견이라는 대변혁을 목격한 청년들의 '고뇌와 연민'이 자기자신으로 향한 것이라면, '묻지마 칼부림 예고'는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된 젊은 청년들이 답답한 미래에 대한 '분노'가 사회로 향한 것이다. '사회적 밈'은 풍자나 해학처럼 시대의 모순과 소망에 대한 집단무의식의 갈망이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때 퍼져 나간다.

모방과 표절보다 진정으로 위험한 것은 '자기표절'과 '자기복제'다. 타인의 모방은 최소한 타인과의 교류를 통한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자기복제는 창작자의 무덤이고, 미래를 향한 탐구를 멈춰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끌려가는 파우스트의 영혼이다.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며 슬픔에서 벗어났고,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며 새로운 시대를 이끌었지만, 자기 세계의 벽을 쌓고 자기연민과 분노표출의 자기복제를 반복한 청년들은 삶의 길을 잃었다. DNA와 밈은 디지털 복제기계에 불과하지만, 타인과의 끊임없는 해후와 조우를 통해 생명과 문화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유일한 통로다.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정신과전문의 juha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