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끊임없는 도전과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해왔다. 역사적 흐름은 시계열적으로 이어져 왔지만 인류가 다음 단계로 진화하는 전환점에는 혁신이 자리한다. 혁신 신기술이나 새로운 서비스는 사람의 일상이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면서 대전환을 이끌어왔다. 혁신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면서 인류의 진화를 이끌었지만,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가치의 충돌로 안타까운 희생이 생겨나거나 혁신이 왜곡되거나 지연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류에게 해가 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이나 디지털 기술이 사회·경제 전 부문과 융합되며 혁신을 가속화하고 있다. 세계 각국은 디지털 혁신을 통해 다른 나라보다 빨리 사회·경제를 발전시키고 배타적 경쟁력을 통해 글로벌 패권(리더십)을 쟁취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디지털 혁신은 어느덧 미래 시대 생존의 키워드가 됐고, 가치충돌을 최소화하면서도 디지털 혁신의 긍정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현명한 해법을 모색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가 됐다. 빠르게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에 기반해 혁신이 이뤄지고 전 부문으로 확산돼 일상화하는 시간도 매우 짧아지고 있으며, 디지털 혁신이 적용되는 개별 분야나 맥락에 따라 그 영향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획일적 잣대로 디지털 혁신에 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디지털 혁신에 대한 일원화된 실체적 기준을 모색하기보다 어떠한 자세나 접근방식으로 디지털 혁신에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먼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혁신에 대응하는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일까. 먼저, 혁신에 대응한 과거 시행착오 사례로부터 교훈을 찾아볼 수 있다.
혁신을 가로막아 국가의 경쟁력을 후퇴시켰던 유명한 사례로는 영국의 적기조례(Red Flag Act)가 대표적이다. 1700년대 발명된 증기기관은 수증기의 열에너지를 기계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킴으로써 자동차나 공장 생산설비 등에 활용됐던 인류의 혁신적 발명품의 하나로 손꼽힌다. 증기기관을 이용해 1826년 영국에서는 W. 헨목이 만든 증기자동차 버스가 세계 최초로 실용화됐다. 그런데 증기자동차의 도입으로 피해를 본 마차업자의 반대와 더불어 증기자동차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남에 따라 1865년 적기조례를 제정해 시내 주행속도를 시속 3km로 제한하고, 운전수, 기관원, 기수 등 3명이 1대의 자동차를 운용하도록 했다. 특히, 기수가 붉은 깃발이나 붉은 등을 가지고 55m 앞을 마차로 달리면서 자동차를 선도해 말이나 말을 모는 사람에게 자동차의 접근을 예고하도록 했다. 보행자나 마차의 안전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제정됐지만, 실제로는 마차 관련업자의 권익을 과도하게 보호함으로써 자동차 산업 발달을 방해해 독일과 프랑스에 뒤처지게 됐다. 결국 1896년에 폐지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영국 자동차 산업은 몰락했고 적기조례로 보호하고자 했던 마부의 일자리도 사라졌다. 혁신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충분한 숙의나 컨센서스 없이 기존 가치만을 보호하려는 일방적 결정이 새로운 혁신을 통한 발전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2018년은 '김치 프리미엄'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가상화폐 광풍이 불었다. 가상화폐나 블록체인은 기존 중앙집중식 체계로부터 탈중앙화된 환경으로 패러다임 전환에 불을 지핀 혁신 사례다. 가상화폐 등장으로 중앙은행 중심 금융 체계를 탈중앙화된 분산형 체계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새로운 기축통화로서 가상화폐의 활용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가상화폐의 대표격인 비트코인은 2017년 한 해 동안 100만원대였던 것이 2000만원대까지 폭증했다. 이후 변동성이 큰 수많은 가상화폐가 등장하거나 사라져갔다. 테라·루나를 발행한 국내 개발자는 대폭락 사태로 금융 사기 의혹이 제기돼 국제적인 수사 대상이 됐다. 디지털 혁신으로 선꼽히는 가상화폐가 출현한 이후 누군가는 '벼락부자'가 됐지만, 수많은 가상자산 투자자들은 '벼락거지'가 되었다.
가상화폐에 투자한 금융소비자 보호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그런데 2018년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됐던 가상화폐 문제와 관련해 관련 부처간 분석·숙의, 충분한 사회적 공론화나 컨센서스의 도출 노력없이 특정 부처 장관이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방안을 일방적으로 공언함으로써 가상화폐 가격이 폭락했고 가상화폐 시장의 혼란이 가중됐다. 당시에는 아직 가상화폐의 개념이나 유형, 범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조차 정립되지 않았고, 다양한 발전 가능성 및 시장에서의 수요와 함께 규제의 필요성이 병존하던 때였다. 새로운 혁신이 출현해 발전가기 시작하던 때에 현상이나 미래 가치에 대한 정확한 분석없이 '금지 발언'만으로 안정적 디지털 혁신의 기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침체를 거듭하던 비트코인가격이 반등해 2021년에는 8000만원까지 급등했고, 지금도 수많은 가상화폐가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다. 최근 제정된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처럼 가상화폐를 제도권으로 수용하면서도 투명성과 신뢰성을 확보해 가상화폐 투자자를 보호할 수 있는 법·제도 기반 구축에 대한 컨센서스 도출을 위한 사회적 공론화 노력을 당시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2019년은 당시 공유경제를 대표했던 타다와 택시업계간 갈등이 극에 달했다. 시민은 차량공유서비스의 혁신성에 환호했지만, 택시 업계는 극렬하게 반대했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슬픈 사건까지 발생했다. 결국 타다 대표는 면허 없는 불법 콜택시 영업으로 형사 기소됐고, 2020년 3월 '타타금지법'이 제정돼 혁신 서비스로 평가받던 '타다 베이직'이 불법화됐다. 하지만, 올해 대법원은 유사 택시 논란에 대해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했다. 택시업계의 기득권도 보호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새로운 혁신과의 공존을 위한 방안을 모색할 수는 없었는 지 반성이 필요한 대목이다.
디지털 혁신을 둘러싼 가치충돌은 현재 진행형이다. 온라인 법률 플랫폼 '로톡'을 둘러싼 변호사법 위반 논란이나 AI 웹툰 보이콧 사태가 대표 사례다. 특히, 최근 생성형 AI가 폭발적인 관심 속에 그 활용이 증가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창작자 권리의 침해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생성형 AI의 혁신성과 미래 가치를 고려해 공개된 데이터나 저작물을 AI 개발을 위한 학습에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입법 논의와 맞물려서, 제한없이 저작물을 학습한 생성형 AI가 유사한 웹툰을 손쉽게 생성, 창작자의 일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AI 웹툰을 집단적으로 보이콧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AI와 같은 디지털 혁신이 계속되고 심화될수록 이러한 가치 충돌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혁신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본래 혁신은 완전히 바꾸어 새롭게 한다는 의미인 데, 기존의 것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혁신은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통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롭게 하는 것이다. 과거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혁신에 따른 현상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적 방법론을 활용한 정확한 미래 예측과 위험 분석이 함께 해야 한다. 객관적 분석의 결과가 설사 어느 한쪽에 불리하더라도 혁신으로 인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과 상충되는 가치의 충돌을 수용할 수 있는 관용 정신이 필요하다. 혁신이 피할 수 없는 미래이고, 옳은 방향이라고 하더라도 현재까지 유지되어 온 가치를 존중하고 미래의 혁신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화·발전할 수 있도록 환경(생태계)을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열린 마음과 관용 정신이 있더라도 개별적·구체적 충돌을 모두 해결할 수 없고, 결국 조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실천적·구체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혁신이 가져온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 특히 이해관계자간 담론 문화가 필요하다. 다양한 관점의 이해관계자간 아이디어 공유와 대화를 통해 미래지향적이면서도 현실적 문제해결을 위한 구체적 해결책, 특히 혁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가치가 미래 사회에서 존중받거나 소멸되는 가치가 미래 사회에 맞게 변화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이 도출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위와 같은 접근방식이 제때 실행되지 않는다면 기득권 보장이나 혁신의 어느 것도 성공할 수 없다.
AI 기반의 디지털 혁신이 심화·가속화하는 시대를 맞아 과거·현재의 가치와 조화를 이루면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공존의 미학이 필요한 때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 kjchoi@gachon.ac.kr
〈필자〉 최경진 교수는 가천대 인공지능(AI)·빅데이터정책연구센터장이다. 데이터·정보통신기술(ICT)·개인정보보호 법 연구자로 관련 법·정책 전문가다. 현재 한국인공지능법학회장, 한국정보법학회 수석부회장, UN 국제상거래법위원회 정부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개인정보보호법학회장도 역임했다. 데이터와 ICT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법·제도 개선과 정책 추진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