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생식을 하는 동물에 있어서 암컷(여성)과 수컷(남성)의 역할은 흥미진진한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과학자들은 초기 인류가 어떤 방식으로 사냥했는지, 사회의 구성 방식이 어떠한 지를 연구해왔다.
이에 여러 가설이 주목받았으며, 그중 하나가 1966년에 처음 제기된 '남성 사냥꾼 가설'과 '여성 채집인 가설'이다. 이 가설은 100만 년 전부터 남성이 동물을 잡는 사냥을, 여성이 과일과 버섯을 따는 채집을 담당했으며, 이러한 습성이 유전자를 통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는 성 역할론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가설에 기반해 남녀의 쇼핑 태도나 연쇄살인 동기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미국 미시간 주립대 대니얼 크로거 교수는 대학생 467명을 대상으로 남녀의 쇼핑 태도와 기술에 옛 조상들의 사냥과 채집 생활이 강하게 남았음을 2009년 사회·진화·문화 심리학 저널에 발표했다.
크로거 교수는 낯선 대형 쇼핑센터에 갔을 때 남학생들은 '필요한 물건을 최대한 신속하게 산다'는 사냥꾼의 태도를, 여학생들은 '색깔과 스타일이 각각 다른 상품들을 많이 둘러보고 이 중 원하는 것을 고른다'는 채집인의 태도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심리학과 마리사 해리슨 박사팀은 2019년 진화행동과학에서 남녀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대상과 동기가 다르다고 밝혔다. 남성 연쇄살인범은 살인이 '사냥'과 같아 '묻지 마 살인'을 한 비율이 높지만, 여성 연쇄살인범은 가족을 포함한 가까운 사이의 사람을 살해해 재산 같은 이익을 '채집'하려는 목적이 크다는 것이다.
해당 가설에 반박하는 학자들도 존재했다. 고대 여성 전사가 발굴된 점을 들며 반론을 펼치기도 했지만, 정설을 뒤집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최근에 기존 성 역할 구분을 무너뜨리는 의견들이 힘을 얻고 있다. 먼 옛날 여성들이 사냥하고 더 나아가 권력을 잡았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한 연구들이 뭐가 있는 지 함께 알아보자.
◇북유럽의 바이킹 여전사와 남유럽의 상아 부인
1880년, 스웨덴 비르카(Birka) 마을에서 장검과 도끼, 창과 단검, 방패 2개와 은제 투구, 보드게임 조각, 말 2마리가 같이 묻힌 무덤이 발견됐다.
은제 투구, 그 당시 값이 비쌌을 말과 같은 부장품으로 보아 지위가 높은 10세기 바이킹 전사의 무덤이리라 추측됐다.
특히 무릎에 놓인 보드게임 조각은 전술과 전략을 시험해 보는 중요한 도구이기에, 강력한 군사 지도자인 것으로도 암시됐다. 학자들은 약 140년 동안 이 무덤의 주인을 남성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스웨덴 스톡홀름 웁살라 대학교 샬럿 헤든 스티나존슨 교수팀은 2017년 아메리칸 신체 인류학 저널에서 이 무덤의 주인이 신장 170㎝ 정도 되는 30대 여성이라고 발표했다.
연구팀은 무덤 주인의 DNA를 추출해 염기 서열 분석과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을 시행했다. 그 결과, X염색체만 관찰되고 남성의 Y염색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연구자들은 이 무덤의 주인이 여성이라면, 같이 묻혔던 부장품은 해당 여성이 아닌 가족의 지위와 역할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에 연구팀은 근처에서 발굴한 나머지 여성의 무덤에는 무기류의 부장품이 없었던 점을 지적했다. 이어 “전투 경험이 없이는 군사적 지위를 가질 수 없으므로, 무덤의 주인은 전투에 참여했던 여전사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페인 세비야 대학교 레오나르도 가르시아 산후안 교수와 마르타 신타스-폐냐 교수팀은 5000여년 전 청동기 시대 스페인 이베리아반도의 최고 권력자가 여성일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2008년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게재했다.
연구팀은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2층 구조로 된 무덤 하나를 발견했다. 무덤 안에는 상아와 수정 단검, 보석의 일종인 호박, 타조알 껍데기, 고급 부싯돌 같은 귀중품이 유골과 함께 들어있었다. 이 무덤은 기원전 3200~2200년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무덤의 주인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 17~25세 남성으로 추정됐다.
이후 연구팀은 무덤 속 유골 치아의 법랑질에서 남녀를 구분하는 단백질인 아멜로제닌(Amelogenin)을 분석했다. 그 결과 X염색체에 있는 여성형 아밀로제닌 유전자 'AMELX'가 발견되고, 남성형 아멜로제닌 유전자인 'AMELY'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무덤의 주인이 여성이라는 의미였다. 연구팀은 무덤 속 부장품 중 하나인 상아에 착안해 이 무덤의 주인에게 '상아 부인(Ivory Lady)'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청동기 시대 당시 유아들의 무덤에는 부장품이 없다. 연구팀은 이를 통해 이들의 사회는 혈통이 아닌 공로와 업적을 통해 높은 지위를 얻는 사회였을 것으로 추측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해당 무덤의 주인과 같은 지위를 누린 남성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무덤 속 여성이 가장 높은 지위를 가졌을 것이라고 유추했다.
더 나아가 연구팀은 “이베리아 청동기 시대의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높은 지위를 누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당 무덤 주변에는 2~3세기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호화로운 무덤들도 발견됐는데, 최소 15명의 여성만이 묻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시부족 여성 사냥꾼, 육아와 사냥 멀티도 가능해
미국 워싱턴대 인류학과 카라 월-셰플러 교수팀은 수렵(사냥)-채집 사회의 여성이 사냥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연구 결과를 지난 6월 플로스원(PLOS ONE)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호주, 아시아, 오세아니아에서 지난 150년 동안 수렵-채집 사회를 조사했던 연구 자료 1400여건을 분석했다. 사냥을 다룬 기록은 63곳이 나왔으며, 이 중 50곳(79%)에서 여성이 사냥하는 모습이 묘사된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여성들이 의도적으로 사냥을 했는 지, 우연히 마주친 동물을 잡은 것인 지도 조사했다. 그 결과 이를 판단할 수 있는 기록 41곳 중, 36곳(87%)에서 의도적인 사냥을 했음이 드러났다.
또 남성 사냥꾼들은 거의 혼자 나서거나 같은 남성과 짝을 지었지만, 여성 사냥꾼들은 대부분 남성이나 여성, 어린이, 개와 함께 집단을 꾸려 사냥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사냥 도구도 여성들이 더 다양했다.
주로 활과 화살을 썼지만, 칼과 창, 석궁, 그물을 사용하기도 했다. 연구팀은 여성의 사냥 도구가 훨씬 다양한 이유로 “임신 중이거나 아기를 업은 채 사냥하는 여성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인류학 랜디 하스 교수팀은 2020년 남미 안데스산맥에서 발굴된 9000년 전 여성 사냥꾼 무덤에 관한 연구 결과를 사이언스 어드밴시즈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2018년 페루 남부 푸노 지구의 해발 4000m 고산지대 '윌라마야 파트샤(Wilamaya Patjxa)' 유적에서 창끝에 매다는 뾰족한 돌 촉과 동물 발골에 필요한 도구 등 대형 동물 사냥 장비가 함께 묻힌 무덤을 찾았다.
처음에는 신분이 높은 남성의 무덤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유골의 치아 법랑질에서 아멜로제닌 단백질을 분석한 결과, 17~19세 여성의 무덤인 것으로 밝혀졌다. 여성의 치아에서 고기 섭취 흔적을 나타내는 독특한 동위원소가 발견돼, 무덤 주인이 사냥꾼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제시됐다.
연구팀은 해당 여성 사냥꾼이 일반적인 사례인지, 극히 일부에 국한된 특수한 경우인지 확인하기 위해, 플라이토세 말기(약 13만년 전)부터 홀로세 초기(8000년 전)에 이르는 아메리카 지역 전체의 무덤 발굴 기록을 분석했다.
그 결과, 총 107개 지역에서 429건의 무덤 발굴이 이뤄진 것으로 조사됐으며, 이 중 27건에서 대형 동물 사냥 장비가 함께 출토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 중 11건이 여성이라는 점이 확인돼, 연구팀은 통계상 여성 사냥꾼이 30~5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현대에도 사냥을 지속하는 여성들이 나타나고 있다. 1980년대 필리핀에서는 아그타족 여성이 자기 키만 한 활을 들고 멧돼지와 사슴을 사냥하는 모습이, 아마존에서는 마테스족 여성이 정글도로 대형 설치류를 잡는 모습이 포착됐다.
1990년대 중앙아프리카에서는 증조할머니와 5세 증손녀가 함께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이 발견됐다. 카라 윌-셰플러 워싱턴대 교수는 “많은 사회에서 여성들이 사냥을 했고, 지금도 한다는 점에서 남성만 사냥한다는 통념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 짓는 연구가 과거에 많았던 이유는 남성 중심의 연구가 많았으며, 현대의 선입견이 이를 강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금부터라도 과거에 발굴한 유물들을 새롭고 평등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성별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미래의 연구가 그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말이다.
글:김자옥 과학칼럼니스트
김영준 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