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용어와 개념 정립에 기반한 한국형 매뉴얼 구축

최근 우리나라에서 중점 지원하는 반도체, 인공지능(AI) 등과 같은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개념 등이 혼재돼 사용되고 있다. 대한민국 산업화가 과거 신속함을 추구하면서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그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의 근간이 되는 용어 및 개념의 정의를 정립하는 데 미진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부, 산업체, 대학, 관련 기관 등이 협력 및 융합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반도체 분야다. 반도체 분야에는 비메모리와 메모리 등을 위한 반도체 제조 기술 영역과 컴퓨터와 자동차, 스마트폰 등 산업 전반에 필수적인 기능을 구현하는 반도체 설계 기술 영역이 있다. 반도체 제조 기술과 설계 기술은 기초 과정부터 고급 과정까지 이수해야 하는 필수 교과목과 적용 기술이 매우 다르다.

한국은 삼성전자 반도체 산업의 눈부신 성공으로 메모리 중심의 반도체 제조 기술을 반도체 기술이라 생각하는 시각이 많다. 반대로 미국, 유럽, 일본, 대만 등은 중앙처리장치(CPU), 주문형반도체(ASIC), 시스템온칩(SoC) 등 비메모리 분야의 반도체 설계를 중시한다. 이들은 설계자동화(EDA) 툴, 반도체 재료 및 장비 등과 함께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반도체 설계 기술을 기반으로 한 반도체 제조 기술이 현재의 대만 TSMC를 가능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AI 분야도 방향 설정을 다시 고려해야 할 시점이다. 인공지능 분야는 뇌과학에 기반한 프로세서, 모델 등 인공지능 구현 기술과 구현 기술들을 로봇, 자동차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적용하는 인공지능 융합 기술로 구분된다. 두 기술의 분류는 매우 다른 전공 지식과의 밀접한 협업이 필요하다.

인공지능 구현 기술은 뇌신경학, 진화생물학, 세포·분자 생물학, 철학, 의학, 동물학, 컴퓨터 공학 등 다양한 전공 분야들과의 협력을 통한 기초적인 인공지능 모델, 프로세서 등을 구현하는 분야다.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는 딥러닝, 학습 데이터 구축 등은 인공지능 융합 기술에 속한다.

융합기술은 탄탄한 기초 지식(수학, 물리, 통신, SW, HW 등)을 기반으로 다른 분야와의 융합을 통해 창출된다. 신규 창출 용어와 명확한 개념 정립이 없으면 의사전달 과정에서 오류와 시행착오를 피하기 어렵다.

선진국들과 신흥공업국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용어와 개념들을 정립한 매뉴얼 수립에 있다. 매뉴얼은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수많은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해 충분한 시간과 의견 수렴을 통해 수립돼야 한다. 예를 들어 국제표준화기구(ISO)는 기술 표준 문서 작업 시 가장 먼저 기술 문서의 적용 범위와 용어를 설정하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 전문가들을 자발적으로 파견한다. 의견 수렴, 검토, 수정 보완, 재 의견수렴 등을 통해 국제 표준으로 제정되는 과정이 일반적으로 3년에 걸쳐 이뤄질 정도로 매뉴얼 작성에 많은 시간과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나라는 매뉴얼을 낡은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매뉴얼은 미래 사회의 안정된 기능 구동을 위한 필수요소다. 매뉴얼 구축에 많은 시간과 인력,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매뉴얼 구축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일단 정비돼 지켜지기 시작하면 단순한 인력으로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

우리도 정부가 국가 인재 양성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지원을 적극 진행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반도체, AI 등 분야에서 환경 구축, 인력 양성 등을 위한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부의 지원 규모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이보다는 세부적으로 지원한 내용과 협력 및 융합 성과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이는 통일된 용어와 개념을 공유하는 매뉴얼 정립을 통해 가능하다. 갖춰진 체계를 통해 지원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관련 전공 희망자, 정부 지원체계, 학부모, 언론 등이 활용할 수 있는 정립된 용어와 개념을 설정하는 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

최명렬 한양대 전자공학부 교수
최명렬 한양대 전자공학부 교수

최명렬 한양대 전자공학부 교수 choimy@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