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쇄신과 변화를 앞세워 기존 전국경제인연합회 간판을 내리고 다음달 새로 출범한다. 지난 전경련 시절의 과오를 씻고 정책기능을 강화한 싱크탱크로 출발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출범과 함께 4대 그룹 합류라는 막대한 동력까지 확보함에 따라 위상 회복을 위한 행보가 속도를 낼 전망이다. 정치권력과 부당한 연대를 과감히 끊고, 기존 대기업 중심 운영 구조에서 탈피해 신산업 등 다양한 회원사를 아우르는 조직으로 변신해야 혁신에 성공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새 출범한 한경협은 정책 기능을 강화해 '한국판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도약을 선언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CSIS는 글로벌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을 심도 있게 분석해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날 한경협 초대 회장에 선임된 류진 회장(풍산 회장)도 앞서 CSIS 이사를 역임했다.
전경련은 지난 5월 자체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을 흡수 통합해 정책 기능 중심으로 운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경유착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고, 회원사 중심 서비스를 강화하겠다는 의도다. 류 회장은 “CSIS 역할이 한경협과 더 맞다고 생각한다”며 “우리나라에 필요한 정보를 많이 모을 수 있어 CSIS 모델을 중심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경유착 우려와 대기업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지적에 개선안도 내놨다. 내부통제시스템인 윤리위원회 설치를 정관에 명시한 게 대표적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기금 마련 등 부당한 요구에는 윤리위원회 심의를 받도록 했다. 여기에 △외부 압력이나 부당한 영향을 단호히 배격하고 엄정하게 대처 △윤리적이고 투명한 방식으로 사업을 영위하고 경영 △기업·경제의 지속적인 혁신을 이끌고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앞장 등 9가지 윤리헌장도 제시했다.
대기업 중심 운영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정관에는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사업'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등 지속가능성장 사업'을 명시하며 변화 의지를 보였다. 지난 5월 발표한 자체 혁신안에도 신사업 영역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활성화해 다양한 회원사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전경련은 한경협으로 새 출발하면서 그간 숙원사업이던 '4대 그룹 복귀'를 이뤘다. 이날 전경련은 임시총회를 통해 4대 그룹 합류를 공식화했다.
4대 그룹의 한경협 합류는 위상 회복은 물론 운영 예산 확보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4대 그룹은 '재계 맏형'으로 한경협 무게감을 높이는데 핵심 요소다. 국내는 물론 글로벌 경제단체 회의, 대통령 순방 등 무대에서도 4대 그룹을 회원사로 둔 행보는 무게감이 다르다.
전경련 위상 회복의 선결 과제 중 하나인 운영자금 확보에도 4대 그룹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4대 그룹이 속한 2015년 전경련 회비 수익은 500억원에 달했지만, 지난해에는 101억원의 5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탈퇴 전 삼성이 내던 연간 회비만 100억원에 달했다. 4대 그룹 복귀로 예전 수준의 곳간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걸고 있다.
다만 4대 그룹 역시 전경련 합류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하고 있는 만큼 당장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회원사로 등록은 하되 가입비 납부나 기금 출연 등은 내부 논의를 거쳐 점진적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
전경련이 환골탈태를 선언했지만 부정 여론은 여전하다. 4대 그룹 합류 분수령이던 삼성 역시 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는 계열사 판단에 맡긴다고 권고했지만 전경련을 둘러싼 불신은 여전하다고 밝혔다. 실제 준감위는 지난 18일 “전경련의 혁신안은 선언 단계에 있는 것이고 실제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과 확고한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 없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삼성증권은 기존 한경연 회원사 5개 삼성 계열사(삼성전자·삼성SDI·삼성생명·삼성증권·삼성화재) 중 유일하게 합류를 거부했다. 부정적 여론을 의식, 이사회가 반대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나머지 계열사 역시 △부도덕하거나 불법적인 정경유착 행위 등이 있을 시 즉시 탈퇴 △회비 납부 시 사전 승인 △연간 활동 및 결산 내용 보고 등 준감위 권고사항을 적극 수용할 계획이다.
정경유착 고리를 끊겠다는 의지를 두고 의문도 제기된다. 새 출범한 한경협의 초대 상근부회장에는 외교관 출신 김창범 전 인도네이시아 대사가 물망에 오른다. 글로벌 네트워크 측면에서 강점이 있지만 관료 출신이라는 이유로 부정 시각도 있다.
상근 고문으로 남는 김병준 회장 직무대행 역시 정치권에 몸담았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야당과 시민단체도 연이어 '정경유착 카르텔' 부활이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한경협으로서는 출범과 함께 혁신 진정성을 보여줘야 할 숙제를 떠안았다.
결국 한경협의 안착은 부당한 정치권력을 배제할 내부통제장치 확립과 대기업을 넘어 중소·중견기업과 상생할 모델 제시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자체 혁신안 발표 이후 구체적인 실행방안이 아직 나오지 않아 불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환골탈태라는 목표에 걸맞은 혁신 실행 방안과 함께 중소·중견기업과 협업, 국민과 소통이 한경협의 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정용철 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