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한 교수의 정보의료·디지털 사피엔스]NFT vs SBT, 소유냐 존재냐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

“죽느냐 사느냐 (To Be or Not To Be),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 시대까지만 해도 인간에 대한 고뇌의 중심에는 '존재'가 있었다. '소유'는 그저 '존재'의 부수적 특성 중 하나였을 뿐. 하지만 산업혁명과 생산과 소비에 기반한 자본주의는 우리의 '존재'를 다름 아닌 우리가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들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에리히 프롬의 명작 '소유냐 존재냐'는 물질적 풍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개개인의 무제한적 자유와 같은 산업사회의 장밋빛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오히려 더 많은 소유와 소비에 집착하는 탐욕만을 부채질했을 뿐이라고 경종을 울렸다. 실제로 18~19세기를 거치며 영어 문장에서 'Have' 동사 사용이 급증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게 되면서, 예를 들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표현은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는 표현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나는 너와는 생각이 달라'는 '나는 너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로 변해갔다.

산업화와 함께 도입된 근대 의무교육은 그 강력한 주입식 교육 시스템으로 '지식'조차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수많은 학생들은 많은 지식들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 시험문제에 정답을 잘 쓸 수는 있지만, 그 지식을 학생 자신의 일부로 '체화'하기에는 실패했다. 인스타그램에 올려둔 수많은 멋진 사진들을 '가지고' 있을 뿐, 사진 속에 담긴 인생의 한 장면이 추억이나 경험으로서 마음속에 새겨지지는 않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소유적 인간'은 마주친 것들을 '소유'하고 '소비'하지만, '존재적 인간'은 그가 내재화한 존재를 통해 '생산'하고 나눈다. 존재는 소유를 줄일수록 그 모습을 드러낸다.

NFT의 뜨겁던 흥행도 잠시, 거품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아트 등 특히 미술 분야에 많이 적용된 NFT는 작가의 창작물에 가치를 매긴 후 쉽게 쪼개어 사고팔 수 있다는 '소유적 특성'으로 큰 각광을 받았다. NFT를 통해 어떤 창작품을 분산 소유하려는 뜻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면 누구 혹은 어느 박물관이 '소장'한다면 모를까, '소유'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수 있을까?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은 최근 '탈중앙화 사회: 웹3의 영혼을 찾아서'라는 논문에서 '영혼합체토큰'(SBT, SoulBound Token)을 제안했다. SBT는 NFT의 일종으로 '대체불가성'을 공유한다. 하지만 NFT는 '자산'처럼 사고팔수 있는 것에 비해 SBT는 '몸'이나 '영혼'처럼 타인에게 '양도불가'한 토큰이다. SBT는, 예를 들어, '우리 10명이 드디어 히말라야 등반을 해냈어'와 같은 어떤 공동의 성취를 인증하거나 어떤 이가 공동체의 한 일원임을 증빙하기 위해 발행된다. 현재 SBT의 '양도불가'한 고유성을 활용해 예술가의 창작품에 SBT를 발행하려는 노력들이 진행중이다. 하지만 SBT는 '양도불가'라는 '비 소유적 특성'으로 작품 거래 촉진에 활용되기는 어렵다. SBT의 이 '존재적 특성'은 많은 작품과 전시회를 수행해온 작가 자신께 메달처럼 수여하는 것이 더 옳다.

그렇다면 창작품에 맞는 디지털 대리물은 없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어느 수준 이상의 창작품은 작가의 창작을 인정하는 '저작권' 대상이므로, 사고 팔리더라도 '특정 작가의 창작품'이라는 꼬리표를 지우지 않는다. 창작품은 생산되지 않는다, 창작자에 의해 '탄생'한다. 그러므로 일종의 '출생증명서'가 발행됨이 적절하다. 창작품에 그 창작자와 연계된 분산신원인 DID(Decentralized ID)와 함께 그 창작자가 수여한 출생증명으로서의 VC(자격증명)를 부여하는 것이 적절하다. 창작자도 포함된 3자관계이기 때문이다.

창작품은 작가에 의해 특정 시점에 그 생명력을 부여받아 출생한 '미완의 존재'다. 그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도 DID와 VC를 발행해야 할까? 아니다. '불국사 석굴암'과 '천지창조' 같은 문화유산은 보통의 창작품을 넘어선 인류공동의 동반자다. 창작자, 소장자, 감상자를 포함한 공동체 전체와 함께 긴 시간의 고난을 극복하며 영감을 공유해온 공동체 일원이므로 그에게 SBT를 수여함이 옳다. '존재'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소비나 거래 대상도 아니다. '존재'는 스스로 '존재'한다.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정신과전문의 juha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