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12월 3일 새벽 2시 15분, 고요하던 인도 보팔의 화학공장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폭발로 순식간에 탱크에 저장돼있던 가스가 누출되기 시작했다. 가스는 주변 마을로 흘러 들어갔고, 사람들은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단체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사고는 미국 화학약품 제조사 유니언 카바이드의 인도 보팔 현지 공장에서 농약 원료인 아이소사이안화 메틸(Methyl isocyanate)이라는 유독가스가 누출되면서 시작됐다. 사고로 현장에서만 3787명이 사망했고, 피해보상을 청구한 사람도 58만명이 넘는다.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섬뜩한 사고는 20세기 최대 인명피해 사고로 기억되고 있다.
화학물질로 인한 사고는 한번 발생하면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인명피해를 초래한다. 그래서 화학물질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과제다. 유럽은 화학물질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약 150년간 세계 화학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크고 작은 화학사고를 겪으며 2007년 기업이 화학물질의 위해성을 사전에 확인하도록 하는 신화학물질규제(REACH)를 도입했고, 2020년 지속가능한 화학전략을 마련하는 등 화학물질 안전관리와 화학산업 혁신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올해 초 과불화합물의 사용제한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용도에 따라 18개월 전환기간 부여 후, 대체물질이 개발 중이거나 개발에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 5년, 이식형 의료품 등 개발에 장기 소요되는 경우 12년간 예외적 사용 허용 후 완전 금지한다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 정부 주도로 석유화학산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50년만에 화학산업 강국이 됐다. 하지만, 산업이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구미 불산유출사고 등 큰 고통을 겪은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유럽의 신화학물질규제를 벤치마킹해 유해화학물질법을 '화학물질등록평가법(화평법)'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으로 개정해 2015년부터 시행했고, 이제 9년 차가 됐다. 그간 화학물질의 유해성 정보를 만들고 화학산업 현장의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노력으로 후진국형 화학사고가 줄어들었다는 성과는 있었지만, 획일적 규제의 작동성을 지적하는 현장 목소리도 여전하다.
2021년부터 민간, 산업계, 정부가 '화학안전정책포럼'을 운영하며 현장 작동성과 국민 안전을 동시에 고려한 합리적 개선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기 시작했다. 올해 상반기에만 6회에 걸친 종합토론을 거친 결과, 위험성에 따라 유독물질 관리 수준을 차등화하고, 신규화학물질 등록·신고제도를 선진국 수준으로 전환하는 등 화평법·화관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미국·일본과 달리 유럽 제도를 도입한 우리나라 제도는 성숙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성숙기에 걸맞게 민·산·관이 사회적 합의를 거쳐 안전도 잡고 기업의 부담도 줄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안전과 건강한 삶을 위해 산업계, 시민사회, 정부는 감시와 견제를 멈추지 말고, 사회적 합의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규제 혁신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사회적 가치 실현을 가로막는 규제가 아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가장 중요한 목표임을 잊지 않는 방향이어야 한다.
김상헌 경성대 교수 fatherofdamin@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