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연구개발(R&D) 사업 예산 배분·조정안 확정에 이어 정부의 내년 예산안 발표가 마무리되면서 과학계 불만이 극에 달하고 있다. 국가 R&D 예산이 33년 만에 처음으로 대폭 축소됨과 동시에 R&D 중추 역할의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예산 또한 연구 추진 비정상화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과학계는 R&D 예산 삭감 공동 대응에 나서겠다는 입장이지만, 이렇다 할 절충안 마련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 장기간 파장이 예상된다.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예산안은 총 656조9000억원 규모로 올해 본 예산 대비 2.8% 증가했다.
이 가운데 정부 전체 R&D 예산안은 25조9000억원으로 올해 31조1000억원 대비 5조2000억원 줄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감축분 가운데 1조8000억원의 경우 교육·기타 부문 R&D를 일반 재정사업으로 재분류한 것에 따른 것으로 실질적 R&D 예산안 감축 규모는 3조4000억원이라는 입장이지만, 10.9%라는 이례적인 감소율로 인한 연구 현장 파장은 심각한 수준으로 분석된다.
출연연 예산의 경우 전년 대비 11% 수준에 달하는 3000억원이 줄어들면서 내년부터 연구 수행에 차질이 생길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실제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23%, 한국화학연구원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은 28% 수준의 예산을 삭감당했다. 출연연 평균 20%, 많게는 30% 수준의 삭감이 현실화한 것이다.
출연연 뿐만 아니라 한국과학기술원(KAIST), 광주과학기술원(G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 등 4대 과학기술원 가운데 일부가 예산이 삭감된 상태다. 이들 기관 및 대학은 국내 R&D 중추 역할을 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로 인한 내년 연구비 확보 불확실성에 따라 기능 수행에 타격이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이는 곧바로 집단 반발로 이어졌다. 지난 28일 4대 과기원 학부 총학생회를 비롯한 포스텍(POSTECH) 총학생회, 서울대 자연과학대·공대 학생회, 고려대 총학생회 등 7개 이공계 학생회는 공동 성명서를 통해 “R&D 예산 삭감은 연구 환경을 급격히 악화시키고, 연구몰입 환경에 지대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예산 삭감의 전면적인 재고를 촉구했다.
이공계 학생을 비롯한 연구계 또한 연구자 노조를 중심으로 이번 사태를 '정치적 목적과 수사(修辭)에 종속된 과학기술정책의 말로' 등으로 비유하며 연일 반대 성명을 이어가는 상황이다. 연구 지속성부터 정부가 강조해 온 도전적 연구 모두 이번 예산 삭감 수준에서는 확보 및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이 같은 반발에 대해 과기정통부는 R&D의 비효율적 요소 제거 및 시스템 전반을 혁신하기 위한 수순이라는 입장이다. 또 출연연 예산 삭감에도 불구하고 내년 인건비는 올해 수준으로 유지됨에 따라 단기 연구과제 등 수주 부담은 크게 높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함께 기관 간 협력을 지원하는 통합예산 또한 1000억원이 반영된 만큼 창의적·도전적 연구 환경 조성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과학계는 이를 두고 해명에 불과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그동안 역대 정권에서 확장 기조를 이어왔던 R&D 예산이 초유의 삭감 사태를 맞이함에 따라 심각한 사기 저하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연구 노조 및 총연합회 등으로부터 공동대책위원회 구성과 함께 이번 사태에 전면 대응하겠다는 움직임도 관측되고 있다.
한 출연연 관계자는 “연구 분야별로 예산이 크게 삭감된 분야 연구진은 불가피한 전직이 필요하며, 장기 수주 연구과제 또한 연차별 진행이 되는 가운데 예산 삭감에 따라 과제 취소 사태가 일어나는 상황”이라며 “미국의 경우 지난 3월 자국 연방 R&D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 투자 수준을 발표한 것과 달리 국내 연구계는 퇴보를 거듭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인희 기자 leeih@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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