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TV 시장을 주도하는 삼성과 LG가 서로의 텃밭을 대대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업황 부진이 길어지면서 신규 시장 창출보다는 상대 진영 공략을 강화해 실적 방어에 나서겠다는 전략이다. 이 같은 전략이 실적 개선에 기여하면 상호 영역 파괴를 통한 주도권 재편 움직임이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TV 영토 파괴를 먼저 시도한 곳은 삼성전자다. 지난해 초 10년 만에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를 전격 출시하며 시장 재진입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55·65·77형을 출시한 데 이어 한국과 미국에선 83형 제품까지 판매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LG전자 텃밭이던 OLED TV 시장 공략을 위해 경쟁관계인 LG디스플레이와 손잡는 파격 선택까지 단행했다. 일부 국가에 출시한 83형은 물론 조만간 출시 예정인 77형까지 LG디스플레이 WOLED 패널을 탑재했다. 커지는 OLEDD TV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선제적 물량 공세가 필요하다고 판단, 경쟁사와 손잡을 정도로 공격적인 전략을 취했다.
시장 재진입 2년도 채 안 됐지만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다. 시장 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글로벌 OLED TV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금액 기준 18.3% 점유율로 시장 2위로 올라섰다. 지난해 같은 기간 3%에 불과했던 점유율이 1년 새 5배 이상 뛰었다. 압도적 선두를 유지하던 LG전자는 물론 기존 시장 2위 소니도 삼성의 맹공에 시장 점유율이 5~7%포인트(P) 줄었다.
LG전자 반격도 만만치 않다. 삼성전자가 80%가 넘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였던 퀀텀닷(QD)-액정표시장치(LCD) TV 시장 공략에 나섰다. QD-LCD TV는 일반 LCD 패널에 QD 필름을 붙여 색재현율을 높인 프리미엄 제품이다.
옴디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글로벌 QD-LCD TV 시장에서 LG전자는 금액 기준 13.7%의 점유율로 처음으로 시장 2위에 올랐다. 지난해에는 시장 집계조차 안 됐지만 QD를 포함한 고색 재현 LCD시장 파상공세로 단숨에 '빅 플레이어'로 부상했다.
LG전자는 2021년 QD와 나노셀 물질을 동시에 이용한 QNED TV를 출시한 데 이어 현재까지 6개 시리즈, 22종의 라인업을 출시했다. 이 중 75형 이상 제품이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초대형 영역에 특히 집중했다.
LG전자의 공세에 시장을 독점하던 삼성전자도 주춤했다. 삼성전자는 2019년까지만 해도 QD-LCD TV 시장에서 90%가 넘는 압도적 점유율을 유지했다. 지난해 상반기에는 81.8%의 점유율을 기록했지만, 올해 들어 LG전자 맹공에 67.9%까지 떨어졌다.
삼성과 LG가 서로 텃밭을 공략하며 TV 영토 파괴에 나선 것은 업황 부진 탓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TV 출하량은 1억9900만대로, 2020년 2억1700만대를 기록한 이후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소비심리가 하락하고 기업 경영지표도 악화되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결국 신시장 진출보다는 그동안 해왔던 영역 중 성과가 미진했던 곳, 그러면서 잠재력이 있는 곳에 자원을 집중하게 됐다. 삼성전자는 OLED TV, LG전자는 프리미엄 LCD TV가 이에 해당됐다.
실제 삼성전자는 17년 연속 글로벌 TV 시장 1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LCD TV 한계에 봉착했다. LCD 패널 인상과 중국 TV 업체의 물량 공세로 수익성은 갈수록 떨어졌고, 지난해부터 이어진 업황 부진으로 재고까지 늘면서 부담은 배가 됐다.
10년 만에 OLED TV 시장에 재진입한 것 역시 이 같은 배경이 작용했다. OLED TV는 일반 LCD TV와 비교해 평균판매단가(ASP)가 3배 이상 높다. 전반적인 시장 부진 속에서도 올해 프리미엄 TV 시장 내에서 OLED TV 점유율은 지난해 36.7%에서 올해 46.1%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올해부터 OLED TV 공세를 강화한 삼성전자는 2분기 영상디스플레이(VD)·생활가전 부문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배 가까이 뛰었다.
LG전자도 약점이던 LCD TV 시장 공략이 절실한 상황이다. OLED TV 시장에서 50%가 넘는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확보했지만 경쟁사들이 차례로 이 시장에 뛰어들면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전체 TV 시장 90%가 넘는 LCD TV 영역에서 약세는 장기적으로 시장 지배력을 키우는데 가장 큰 리스크로 꼽힌다. LG전자는 지난해 4분기 출하량 기준 하이센스, TCL에 밀려 시장 4위까지 밀렸다. 올해 상반기 역시 이 구도가 유지되면서 자칫 글로벌 시장에서 '공급 파워'가 중국 업체에 영영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제기된다.
프리미엄 시장을 지향하는 상황에서 중국 업체가 장악한 중저가 시장 공략보다는 QD-LCD TV 영역 공략이 최선의 선택지가 됐다. LCD TV 영역 중에서도 프리미엄 제품으로 꼽히는 QD-LCD TV는 올해 글로벌 출하량이 전년 대비 26%나 증가한 1666만8100만대로 예상된다. 수익성은 물론 잠재력까지 풍부해 LCD TV 시장 중에서도 최우선 공략 대상이다.
삼성과 LG의 텃밭 공략은 양사의 TV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는 우리나라 TV가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중국을 견제, 글로벌 초격차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TV 업계 관계자는 “삼성, LG가 상호 영역 침투로 부족한 부분을 강화한다면 전반적인 포트폴리오 경쟁력을 높일 기회”라며 “최근 물량 공세, 저가 정책 등으로 추격하는 중국 업체를 따돌릴 수 있는 기술·시장 초격차 기반도 마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용철 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