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DI와 현대자동차의 전기차 배터리 계약은 유럽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양사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로 풀이된다. 유럽은 현대차 전동화 전략의 핵심 지역 중 하나로 배터리 공급망 강화가 필요했고, 삼성SDI는 유럽 생산 기지를 바탕으로 고객사 확대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은 중국에 이은 세계 2위 전기차 시장이다. 지난해 말 기준 전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12%를 차지했다. 현대차는 2030년까지 전기차를 올해(33만대)보다 6배가 넘는 200만대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는데, 이중 유럽 시장 판매량 목표가 51만대로 전동화 전략의 4분의 1을 책임지는 지역이다. 이런 가운데 유럽연합(EU)이 2035년까지 내연기관차 판매 중단을 선언한 만큼 현지 생산체계를 갖추는 일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
현대차의 기존 배터리 협력사인 SK온과 LG에너지솔루션은 물론 중국 CATL도 유럽에 배터리 공장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차가 삼성SDI와 첫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은 건 '각형' 배터리 수급 안정화 때문으로 풀이된다. 각형 배터리는 사각 캔이 내부를 보호해 파우치형보다 제품 안정성이 뛰어난 것이 장점으로 꼽히는 제품이다. 현대차는 SK온과 LG에너지솔루션에서는 주로 파우치 배터리를, 각형은 중국 CATL에서 구매했다. CATL 유럽 공장에서 각형을 공급 받을 수 있겠지만 이 경우 의존도가 높아진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같이 EU에서는 유럽판 IRA라 불리는 핵심원자재법(CRMA)을 도입하는 등 공급망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데, 특정 기업에 종속될 경우 공급망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삼성SDI는 이번 계약으로 고객사 확대 효과가 기대된다. 삼성SDI는 그동안 BMW, 스텔란티스, 폭스바겐 등 유럽 완성차 업체가 주 거래처였는데, 현대차까지 추가해 전기차 배터리 사업 확대에 탄력이 붙게 됐다. 특히 삼성SDI가 공급하는 각형 배터리는 판매량이 많은 현대 C세그먼트 전기차에 적용될 것으로 알려져 그 효과가 상당할 전망이다.
삼성SDI와 현대차의 배터리 협력은 성사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과거 삼성이 자동차 시장에 진출하면서, 양 그룹이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2020년 5월 단독 회동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양사는 이듬해 하반기부터 배터리 기술 기술 교류와 선행개발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에는 현대차가 파우치형 배터리만 활용했는데, 하이브리드부터 전기차에 이르는 전방위 기술 논의가 각형 배터리 제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는 전언이다.
재계 라이벌로 치열한 경쟁을 펼친 두 그룹은 자동차 전장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를 아이오닉5에 공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삼성전자가 차량 인포테인먼트(IVI)용 AP '엑시노트 오토 V920'을 현대차에 공급하기로 하고 최근에는 삼성전기가 카메라 모듈을 공급하기로 했다. 이번 공급계약으로 협업 범위가 배터리까지 삼성그룹 전자 계열 전체로 확대됐다.
시장조사업체 EV볼륨스 김병주 한국 대표는“현대차가 배터리 공급선을 다변화하면서 그동안 거래가 없었던 삼성SDI가 추가된 것에 의미가 있고 열 확산 방지 규제에 따라 각형 배터리가 선호되는 변화도 눈여겨볼 만하다”고 평가했다.
이호길 기자 eagles@etnews.com, 정현정 기자 ia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