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설 '걸리버 여행기'는 사실 당대 영국 상황과 제도를 비판하는 풍자 소설이다. 소설 속 걸리버는 도착한 나라의 사람들과 몸집과 사고방식이 매우 달랐기에 철저한 이방인 취급, 정확히는 괴물 또는 장난감 취급을 받는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그 동화를 읽고 상상하는 독자의 생각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소인국의 소인들은 모두 똑같이 작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인국의 거인들은 똑같이 클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는 점이다. 모르긴 해도 성인이 돼 제대로 된 걸리버여행기를 다시 읽게 되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소인국과 거인국의 통일된 신체 분포에 대해 달리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의 키와 몸집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신체 크기와 비율도 다르지만 운동 능력, 지적 능력, 사고방식, 취향 등 어느 하나 동일한 특성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인구의 특성을 대표하는 값으로 사용되는 것이 '평균'이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과 거인의 몸집, 키는 평균값일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소인국에도 특히 더 작은 소인부터 상당히 키가 큰 소인까지 다양한 체구의 소인이 존재했을 것이다. 다시 해석해보면 걸리버는 극단적으로 키가 컸겠지만 장난감처럼 취급받지는 않아도 됐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는 어떤 특성이든 그 값이 평균을 중심으로 하는 정규분포를 띠면서 넓게 분포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특성의 분포가 우리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를 통해 소위 '스펙트럼'이라고 불리는 것을 알게 됐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과 거인도 아마 키와 몸집이 평균값을 중심으로 스펙트럼처럼 분포돼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신체적·정신적인 특성이 스펙트럼 형태로 다양하게 분포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평균값에서 많이 벗어나는 사람을 매우 이상하게 여기면서 극단적으로는 괴물, 또는 장난감처럼 대한다. 인구분포의 특성 스펙트럼을 잘 알면서도 이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 아닌가.
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매일 새롭게 나타나는 디지털 기기와 서비스를 이용하기 힘들어하는 소위 평균 능력치 미만의 사람도 늘고 있다. 고령 인구와 장애를 가진 사람까지 합하면 우리 인구에서 능력치 평균값 주변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매년 급속하게 늘어난다는 뜻이다.
어제까지 멀쩡히 잘 쓰던 휴대폰이 어느 날부터 키패드 하나 없는 매끈한 스마트폰이 돼 시장에 깔리고 난 뒤부터 갑자기 걸리버가 된 사람들이 많다. 은행 창구를 찾아가면 친절하게 맞아주던 직원이 사라지고 나서 아예 찾아갈 은행이 없어지더니 겨우 사용법에 적응한 ATM 기기도 하나 둘 모습이 없어지면서 갑자기 걸리버가 된 사람들도 많다. 젊은이들이 쉽고 빠르게 사용하는 음식점의 키오스크 앞에서 뒷사람의 눈치를 보며 쩔쩔매는 수많은 걸리버들은 또 어떤가.
오늘날 걸리버처럼 이상한 나라로 항상 여행하면서 낯선 환경, 낯선 서비스에 당황하고 낯선 사람들로부터 거인으로 또는 소인으로 취급받는 '디지털 약자'들이 많다. 인구 평균치의 능력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이 디지털 기기와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들은 한 번쯤 이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성일 성균관대 시스템경영공학과 교수(한국접근성평가연구원 이사장) silee760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