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지인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외국의 어느 기후단체가 '한국은 배터리 수출로 큰 득을 보고 있는 데, 왜 내연기관차 포기를 선언하지 않느냐'라는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그룹은 한국 연기금의 ESG 투자 대폭 확대를 주장한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 등 행보를 보면 탄소중립을 향한 길은 그렇게 단선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인플레이션감축법이나 탄소국경조정제, EU핵심원자재법은 각 국의 산업육성을 기반으로 저탄소 경제 역량을 키워나가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탄소중립 정책은 온실가스 감축 성과, 즉 2030 온실가스 감축목표 달성에 맞춰 있으며 관련 산업 육성과 이를 위한 재원 마련, 인센티브 제도 도입 등은 후순위다.
내연기관 포기를 선언한 유럽 국가들은 탄소중립 목표 수위나 정책도입 속도를 조절하는 상황이다. 영국은 경유와 휘발유차 신차 판매금지 시기를 2030년에서 2035년으로 연기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국민을 파산시키면서까지 지구를 구하지 않겠다”며 실용적 탄소중립 정책으로 노선 전환을 표방한 바 있다. 게다가 영국은 서비스 업종이 GDP의 70%, 제조업은 18%인 반면 우리나라는 30% 이상이 제조업에 기반해 영국 모델을 추종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유럽의 자동차 메이커 역시 기존 내연기관 기술을 완전 포기하고 전기차로 전환할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세렌디피티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원래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기술개발 과정에서 뜻밖의 발견을 이루게 되고, 이게 새로운 창조적 기회로 연결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페니실린, 엑스레이, 전자렌지 등 수많은 사례가 있다. 탄소중립 구호 아래 화석연료 관련 기술과 산업은 '못된 놈'이라는 주홍글씨식 몰아붙이기는 발전용 터빈과 제련, LNG선 등 기술개발을 단절시키게 되고, 이는 향후 우주항공산업과 방위산업 발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사태에서 보듯이 에너지안보는 국가안보로 직결되는 세상이다. 우리가 내연기관을 완전 포기했을 때 한반도의 유사 사태 발생 시 전기 배터리로 장착한 장갑차와 탱크로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에이브람스 탱크는 가스터빈, 우리나라 K1전차는 디젤엔진을 쓴다. 그리고 에이브람스 제작사인 제너럴 다이나믹스는 F-16과 같은 전투기 터빈을 제작한다.
세상의 많은 기술은 이렇게 연속성의 결과로 창조와 파괴, 혁신과정을 거치면서 또 재창조된다. 한국이 반세기 걸쳐 이룩한 여러 기술이 당장의 무탄소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내려놓으라는 주장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이 하는 요구인지 답답한 상황이다.
연기금 문제도 마찬가지다. 건전한 형태의 ESG는 확대해야겠지만 맹목적 추구는 국민의 생명줄인 연기금을 위태하게 만들 수 있다. 에너지 분야 유명 저널리스트인 하비에르 블라스는 플러그 파워의 유동성 위기는 ESG의 맹목적 투자 리스크가 얼마나 심각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라고 말한다.
지금 경제위기로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관리가능 수위를 넘어 부동산 PF와 가계부채, 대책마련이 시급한 연금과 인구 및 노동력 사태, 한전부채를 포함한 전력시장위기와 탄소중립발 요금청구서 증가 등 시한폭탄이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다. 잠재GDP를 끌어올릴 수 있는 산업기반이 없는 탄소중립 정책은 결국 허구적 구호로만 남게 될 것이다. 탄소중립이 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우리의 기술구조와 산업 기반 역량을 확충해나가야 할 것이다.
박호정 고려대 교수, 전 한국자원경제학회장 hjeongpark@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