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게 '혁신'은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위기를 맞아 우물쭈물하다가는 순식간에 뒤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그간 해왔던 일이나 새롭게 해야 하는 일들을 바꿔보려고 애쓴다.
혁신이 일상화된 데에는 혁신의 유효기간이 있어서다. 제품이나 서비스는 한번의 혁신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지속적으로 받기 어렵다. 스타트업을 봐도 그렇다. 휴대폰으로 택시를 손쉽게 부르고, 집에서 몇 번의 클릭으로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심지어 처방약까지도 배달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박수를 쳤다. 하지만 세상에 없던 이들 서비스가 일상화되고 당연시되는 순간 '혁신'은 수명을 다한다. 다시 또 다른 혁신을 내놔야 소비자들이 불평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는다.
최근 정치판에도 '혁신'의 바람이 거세다. 보수와 진보가 갖고 있는 올드한 프레임을 깨고 외연 확장을 하기 위해서다. 주로 외부 인사를 영입해 '혁신위'를 가동한다. 특히 총선 전에 혁신위는 매번 꾸려진다. 지지층 결집은 물론 돌변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당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포석이다.
국민의힘 혁신위는 지난달 인요한 위원장을 앞세워 당 쇄신에 나섰다. 파란 눈에 금발,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의사'라는 외의의 인물을 내세워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활동 한달여 만에 '조기 해체론'까지 거론되고 있다.
혁신위가 내건 1호 안건인 '대사면'은 당사자들에게 외면받는 사면이 되고 말았고, 2호 안건으로 던진 '중진·친윤 험지 출마' 혁신안은 표적이 된 의원들의 반발을 사며 현재까지 붕 떠 있다. 심지어 김기현 당 대표는 “당 리더십을 흔드는 급발진”이라며 혁신위에 경고장을 날리기도 했다.
인요한 혁신위는 3호 안건으로 비례대표 당선권 순번 청년 50% 공천 의무화 등을 당 최고위원회에 보고했지만, 최고위는 '공천관리위원회'로 공을 넘겼다. 4호 혁신안으로 내놓은 '전략공천 배제 방안'도 반발이 거셀 전망이다.
당 지도부는 혁신위에 전권을 부여했다. 인요한 위원장이 첫 일성으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고 주문했을 때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너는 떠들어라, 우리는 우리 갈 길 가겠다'는 식이다. 급기야 인요한 위원장이 '대통령실의 의중'이 담긴 것이라며 압박했으나 여전히 무반응이다. 이럴거면 왜 혁신위는 만들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앞서 민주당 김은경 혁신위를 향해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맹비난했던 국민의힘도 결국 똑같이 사기를 치고 있는 형국이다. 매번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인요한 혁신위의 활동 기간은 12월 24일까지다. 정권을 유지할 동력을 얻기 위해선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 혁신위를 허수아비로 만들수록 민심은 멀어질 수 밖에 없다. 국민의힘 스스로 혁신위의 유효기간을 줄여선 안 된다.
최소한 혁신위 안건을 숙고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한다. 혁신위가 내놓은 불체포특권 등 의원 특권 포기나 구속될 경우 세비 전면 박탈 등은 충분히 당 차원에서 진지하게 논의해 볼만하다. 다른 어떤 안건 보다 민심의 이목을 집중시킬 개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혁신은 낡은 생각을 버리고, 새롭게 생각하는 결단에서 시작한다. 이제는 오랜 기간 지배해온 여의도 정치문법을 뒤집어야 할 때다. 병을 고쳐달라고 찾아간 의사를 믿고 따르는 것에 환자의 목숨이 달렸다.
성현희 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