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와 악재가 많은 시기의 경영은 안정을 우선시한다. 하지만 시시각각 새로운 이슈가 나오는 현 시대에선 변화와 혁신도 외면할 수 없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한 재계의 연말인사가 시작됐다. 코로나 19 이후 글로벌 경기 침체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고, 전쟁 등 국제적 갈등 리스크는 더 확대됐다. 주력사업과 신수종 사업의 조율, 시장 전략 재편 등 위기 돌파를 위한 새로운 진용 짜기가 2024년을 맞는 재계 총수에게 주어진 숙제다.
◇이재용, '뉴 삼성' 조직개편
삼성 연말인사의 관심은 올해 부진한 실적을 거듭했던 삼성전자의 인적 쇄신 여부에 쏠린다. 반도체 경기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지만 내년 전망이 녹록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다.
한종희 DX(가전) 부문장(부회장)과 경계현 DS(반도체) 부문장(사장)의 대표이사 '투톱 체제'를 흔들지에 따라 '안정'과 '쇄신' 기조의 윤곽이 드러난다. 업계에서는 올해 전체 부진 속에도 실적을 뒷받침해 준 MX(모바일) 부문을 포함한 3인 대표이사 체제 복귀 여부를 두고 관측이 엇갈리고 있다.
2인 대표 체제로 바꾼 지 2년밖에 지나지지 않았으나 취임 후 두 번째 새 사업연도를 맞는 이재용 회장이 자신만의 구상을 담은 '뉴 삼성'을 시도한다면 변화 가능성이 있다. 한 부회장이 겸직하고 있는 영상디스플레이와 생활가전사업 부문장 자리에도 업무 분리 또는 새 인물 선임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 부회장의 임기는 2026년 3월까지이며 경계현 사장과 노태문 MX사업부장(사장), 박학규 CFO(사장), 이정배 메모리사업부장(사장)의 임기는 2025년 3월까지다.
실적 회복의 키를 쥔 DS부문은 최근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성장에 대응, 관련 조직과 연구개발(R&D)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운영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주도권을 탈환하기 위한 신규 메모리 전략을 수립·전개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반도체 미세 공정 전환 한계에 대응하기 위해 패키징 사업 강화를 위한 조직 변화가 점쳐진다.
삼성 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콘트롤타워의 재건 여부는 매년 인사 시즌마다 언급되는 단골 메뉴다. 현재는 삼성전자 사업지원TF, 삼성생명 금융경쟁력제고TF, 삼성물산 EPC경쟁력강화TF 등이 해당 역할을 일부 제한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과거 미래전략실과 같은 그룹 콘트롤타워를 신설하려면 지주회사 체제를 갖춰야 하는 만큼 현 TF를 바탕으로 한 조직 개편이 점쳐진다. 이에 따른 정현호 사업지원TF장(부회장)의 거취도 주목된다.
◇최태원, '서든데스' 해법 찾기
SK그룹의 인사 화두는 '세대교체'와 '안정'이다. 지난해 인사에서 대외 리스크 대응을 위해 부회장 다수를 유임한 기조가 올해도 이어질지 관심거리다. 장동현 SK 부회장,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 조대식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박정호 하이닉스 부회장 등을 두고 다양한 관측이 제기된다.
최태원 SK 회장은 평소에도 인사 관련 의중을 겉으로 쉬이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다만 최근 일련의 발언을 통해 대외 환경에 상당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음을 표현했다. 그는 지난달 SK 최고경영자 세미나에서 “급격한 대내외 환경 변화로 빠르게, 확실히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며 2016년 이후 다시 '서든 데스'를 언급했다.
그룹 핵심 사업군의 대외 환경이 녹록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최 회장이 쇄신 카드로 세대교체를 단행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다만, 인사폭과 관련해선 '안정'에 무게가 쏠린다. 과거처럼 조용한 변화를 추구하는 기조가 올해도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사장단 인사와 관련해선 추형욱 SK E&S 사장, 나경수 SK지오센트릭 사장 등이 임기를 마치는 시점과 맞물렸다. 수소, 재활용 플라스틱 등 SK그룹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낙점한 사업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의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외부 전문가 영입, 3040 약진 등 깜짝 인사 여부도 관전 요소 중 하나다. 재계 관계자는 “SK그룹의 인사는 급변하는 사업환경에 빠르게 대응하면서도 내부 혼란을 최소화하는데 초점을 맞춰 왔다”면서 “일부 부회장급 인사에 변화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변화폭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의선, 혁신 중심 세대교체
현대차그룹 올해 인사 키워드는 미래 모빌리티 사업 가속을 위한 성과·역량 중심 '세대 교체'다.
이는 지난 17일 현대차그룹이 단행한 하반기 대표이사·사장단 인사에서도 드러났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 대표에 이규석 현대차·기아 구매본부장 부사장, 현대제철 대표에 서강현 현대차 기획재경본부장 부사장을 각각 사장으로 승진 선임했다.
사업 성과와 역량이 검증된 리더를 주요 그룹사 신임 대표이사로 전진 배치해 성과 중심 책임경영 체제를 강화하고, 미래 핵심 전략 수립·실행을 가속한 것이 특징이다. 현대차그룹은 연말에 일괄 실시하던 임원 인사를 2019년부터 연중 수시 인사 체계로 전환했다.
현대차·기아 연구개발(R&D) 분야에서는 김용화 사장과 송창현 사장 투톱 체제가 유지될 전망이다. 김 사장은 올해 5월 현대차·기아 연구개발본부를 총괄하는 최고기술책임자(CTO) 사장에 올랐다. 김 사장은 CTO 산하에 부문별 독자적 개발 체계를 갖춘 R&D 조직을 구성하며 미래차 시대에 대응하고 있다.
정의선 회장이 영입한 송 사장은 기존처럼 현대차·기아 SDV본부와 포티투닷을 총괄하며 그룹이 추진하는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전환에 힘을 싣는다.
현대차그룹은 내달 부사장급 이하 정기 임원 인사를 실시할 에정이다. 미래 사업 전환에 필요한 변화·혁신을 주도할 리더 육성과 발탁을 중심으로 과감한 인사가 예상된다.
지난해 말 임원 인사에서는 총 224명이 승진했고, 신규 선임자 3명 중 1명을 40대로 발탁했다. 올해도 국적·나이·성별을 불문하고 비슷한 규모의 철저한 성과 중심 인사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구광모, 안정 속 미래 대응
구광모 LG 회장은 지난해 인사에서 변화보다는 안정에 방점을 찍었다. 주요 계열사 CEO를 재신임해 미래 준비에 임하게 했다. 올해 역시 불확실한 대외 리스크에 대응하면서 미래 설계 연속성을 갖기 위해 안정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가장 큰 관전 포인트는 구 회장을 보좌하는 3인 부회장 체제 유지 여부다. 권봉석 LG 대표이사 부회장은 1963년생으로 비교적 젊은데다 지난해 승진한 만큼 향후 몇 년 간 그룹 내 주요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이 높다. 권영수 부회장 역시 LG에너지솔루션 대표 취임 이후 전년 대비 큰 폭의 성장을 거둔 만큼 유임이 유력하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석유화학 업황 부진 속에서도 선방했다.
부회장 3인방을 유지하면서 추가 승진을 통한 '4인 체제' 전환 전망도 나온다. LG 부회장단은 지난해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이 18년 만에 용퇴해 3인 체제로 운영됐다. 신임 부회장 후보군으로는 미래 포트폴리오 전환 성과를 인정받고 있는 정철동 LG이노텍 사장과 업황 부진에도 사상 최대 실적을 이끌고 있는 조주완 LG전자 사장 등이 거론된다.
구 회장의 미래 준비 철학에 따라 젊은 인재의 전진 배치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LG그룹은 미래 준비 근간이 되는 연구개발 분야 신규 임원 31명을 발탁하고, 전체 신규 임원 중 92%를 1970년 이후 출생으로 채웠다. 구 회장이 디지털전환을 기반으로 한 전사 포트폴리오 고도화를 강조한 만큼 젊은 인재 임원 등용 폭을 넓힐 것으로 예상된다.
조정형 기자 jenie@etnews.com, 최호 기자 snoop@etnews.com, 정치연 기자 chiyeon@etnews.com, 정용철 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