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전시회가 돌아온다

지난 달 올해로 54회를 맞은 한국전자전(KES)이 코엑스에서 개최됐다. KES는 1969년부터 개최돼 규모와 역사 면에서 국내 최고의 전자·IT 종합전시회로 오랫동안 우리 전자산업과 함께 성장해 왔다. 하지만 국내기업 중심 '우물 안 개구리'라는 한계와 품목별 전시회가 다수 태생하면서 볼거리 부족 등 문제에 직면한 것도 사실이다.

박청원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상근부회장
박청원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상근부회장

KES 주관기관인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는 이러한 한계를 인지하고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올해 'KES 2023'은 글로벌 전시회로 나아가기 위한 '연결과 협력'을 키워드로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대표적 사례가 세계 최대 전자·IT 전시회 'CES'를 주관하는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 게리 샤피로 회장의 KES 방문이다. 그는 키노트를 통해 국내 최초로 'CES 2024 프리뷰'를 발표하며 국내 전자업계로부터 주목받았다. 또, KEA-CTA간 협력회의를 통해 한·미 양국의 기술 혁신을 도모하고 'CES-KES 전시플랫폼' 뿐만 아니라 양 기관의 상호발전을 위해 지속 소통하기로 뜻을 모았다.

◇글로벌 전시 트렌드: 산업의 융·복합화

최근 글로벌 전시는 산업간 경계가 모호해지고 타 산업과 융합되면서 전시 범위가 넓어지며 참가업체도 다양해지고 있다.

글로벌 3대 전자·IT산업 전시회 개요
글로벌 3대 전자·IT산업 전시회 개요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에서 최근 주요 트렌드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분야가 바로 '모빌리티'다. 지난해엔 2300여개 참가업체 중 200개 이상이 완성차, 부품사, 자율주행 관련 기업이었고, 올해에는 더 나아가 항공·우주로 확장되는 모빌리티 모습을 제시했다. 여기에 처음으로 '인간안보'라는 개념을 제시, 각종 기술 개발·융합이 결국은 인간의 안녕을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세계 최대 모바일 전시회인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에서도 시티은행, HSBC, 비자, 페이팔 등 글로벌 금융기업 뿐만 아니라 보건의료, 교육, 농업 등 다양한 산업의 기업이 참여해 디지털 기반 모바일 기술 융복합 트렌드를 보여줬다.

이렇듯 전자·IT산업의 글로벌 대표 전시회가 산업 디지털 전환기를 맞이해 타 산업과 융합, 외연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글로벌 전시 트렌드: 국제정세와 부합한 지역 블록화

한때 CES 최대 고객은 '중국'이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중국 참가업체와 관람객이 너무 많아 'C(China)ES'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지만 미국과의 기술패권 경쟁과 대중 반도체 제재 등으로 화웨이를 비롯한 샤오미, 하이얼, 창홍 등과 같은 중국 간판기업의 부스를 'CES 2023'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빈자리를 한국의 혁신기업이 차지하며, 역대 최대 규모인 550개사가 참가했다.

이와 반대로 유럽에서 개최되는 'MWC 2023'에서 화웨이는 입구와 가장 가까운 제1전시관의 전체면적 대부분을 사용하는 초대형 부스(9000㎡)를 구성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밖에 오포, 비보, 샤오미, 리얼미 등 중국 스마트폰 제조기업도 신제품을 대거 공개하면서 중국기업은 미·중 갈등 국면으로 미국의 CES를 대신해 유럽에서 열리는 'MWC'를 글로벌 시장진출의 교두보로 선택했다.

글로벌 전시는 시장의 불확실성과 미중 패권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동맹국 중심으로 공급망이 재편되는 '세계경제의 블록화 현상'을 따라가고 있다. 글로벌 대격변기를 맞아 우리나라 전시산업도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기회'와 '위기'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된다.

◇글로벌 전시 트렌드 : 지역성을 반영한 콘텐츠로 글로컬

올해 '글로벌 미팅스 앤 이벤츠 포케스트'에 따르면 향후 국제회의, 전시회, 콘퍼런스 개최 시 우선적으로 고려할 대륙 내 선호 도시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대륙별 선호 개최도시 톱5
대륙별 선호 개최도시 톱5

유럽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미국의 라스베이거스가 대륙별 상위를 차지했다. 대표적 레저 도시이면서, 참가자를 위한 소비 콘텐츠가 충분함을 입증했다. 여기서 우리나라 서울이 순위권에 나타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아태지역 대표 IT 전시회 '커뮤닉아시아'를 개최하고 있는 싱가포르는 2014년부터 '연결된 도시(Connected City)'를 핵심 비전으로 세우고 도시 내 연계성 강화에 정부가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이제는 이벤트의 콘텐츠와 경험적 요소에 지역성을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석자들의 경험 강화를 위해 사람들의 연결 욕구를 이해하고, 혁신적 콘텐츠와 핵심 메시지를 함께 제시해야 한다.

◇국내 전시산업, '연결과 협력' 기반 성장 기틀 마련

우리나라 산업전시회가 △글로벌 브랜딩 △산업간 융합콘텐츠 강화 △새롭게 확충되는 전시 기반 시설을 통해 양적·질적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첫째, 전시회의 목표와 가치를 명확히 하고 시장의 진화에 적극 대응해 나가야 한다.

모든 전시회가 어떤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지, 중점을 두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전시 참여기업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노출하고 네트워킹 기회를 얻기 위해 전시회에 참가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전시회가 제시하는 목표와 가치를 일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기술과 산업의 변화에 따라 시장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만큼 전시회는 새로운 주제를 도입해 최신 동향에 대응하고 이해관계자들에게 핵심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최근 CES를 보면 과거 가전산업에서 출발해 모빌리티를 넘어 이제는 우주산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혁신기술에서 지속 가능한 친환경 기술과 UN SDGs(지속가능발전목표)를 약속하며, 인류의 보편적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로 넘어가고 있다.

세계이동통신산업자협회(GSMA)가 매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여는 'MWC'는 비즈니스 국제회의가 전시회로 발전한 대표적 성공사례이다. 2000개가 넘는 기업이 전시회 기간 500여건의 크고 작은 콘퍼런스·세미나를 함께 개최한다. 1년에 한 번 나흘간 열리는 이 행사로 바르셀로나가 얻는 경제효과는 약 3억유로(4225억원)에 달한다.

한국전자전 온라인 상설전시관
한국전자전 온라인 상설전시관

둘째, 유사 전시회 통폐합의 가능성을 검토해 양적·질적 성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연간 국내에서 개최되는 전자·IT산업 전시회는 코엑스에서 개최되는 'KES'를 포함, 전국적으로 30여개에 달한다. 대부분 소규모 유사 전시회로 봄·가을 등 특정 시기에 집중돼 있다. 이는 국내 전자·IT분야 산업전시회가 규모 확장의 한계와 지역적 접근성 문제에 부딪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전시회 통합은 전시회 경쟁력 제고와 업계 비용절감 측면에서 긍정 효과가 있다. 하지만, 전시회 주관기관간 협력과 이해관계 조정, 정부의 협력이 지속 필요하므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전시산업 재편의 방향을 제시하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분야를 식별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전시회의 양적·질적 성장을 위해 산업 단체 및 이해관계자들과 협력해 전시회 산업의 통폐합 가능성을 검토 및 조정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국제적인 전시회 및 비즈니스 확장을 지원함으로써 국내 전시산업을 글로벌 시장으로 연결하는 데 정책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셋째, 전시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대형 전시컨벤션 인프라가 확충돼야 한다.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대형 전시컨벤션 시설이 부족해 기존 행사의 외연 확장이 어렵고, 신규 국제행사 유치 기회 상실 등 전시산업 성장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CES, MWC 등 글로벌 톱 전시회는 대부분 10만㎡ 이상의 대형 전시장을 통해 주변 인프라와 연계성을 높이고, 지역 관광산업과 문화 콘텐츠를 연계하여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규모가 큰 전시컨벤션센터는 지역 랜드마크가 돼 지역 비즈니스 창출의 핵심시설로 활용될 수 있다. 2031년 준공을 목표로 서울 잠실 일대에 코엑스의 2.5배 규모의 대형 전시컨벤션 시설이 들어설 계획이다. 주변에 한강, 탄천과 어우러진 생태·문화공간이 조성되고, 이 지역을 세계적 수준의 '스포츠·마이스 복합단지'로 육성하는 기반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판 CES, 한국판 MWC와 같은 글로벌 전시회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지역별, 산업별 특색에 맞는 전시 인프라 확충이 필요한 이유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브랜딩을 위한 해외 전시파트너와의 국제협력이다.

세계 무역질서의 변화와 불확실한 글로벌 통상환경 속에서도 우리나라 기업들은 CES, MWC, IFA 등 글로벌 전시플랫폼을 통해 세계시장 진출을 위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이런 전시를 운영하는 글로벌 전시파트너는 세계 각국의 전시회와 관련 산업 분야에 대한 폭넓은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우리나라 전시회가 글로벌 시장에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해외 참가업체와 관람객을 유치하여, 수출기업의 판로개척을 지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KES 2023'은 올해 처음으로 CES를 주관하는 CTA와 오프닝 키노트를 비롯 한-미 양국간 전자·IT산업의 공동발전을 위한 전시회 협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글로벌 전시 트렌드에 발맞추어 전시산업에서도 글로벌 전시파트너와 긴밀한 국제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박청원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 상근부회장 cwpark9@gokea.org

〈필자〉부산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밴터빌트대 경제학 석사, 건국대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7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해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조정실장·산업정책실장·대변인, 방위사업청 차장을 지냈다. 제7대 전자기술연구원(KETI) 원장, 건국대 특임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 상근부회장직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