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선수의 유럽 빅리그 진출은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계기로 본격적인 물꼬가 트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연결고리는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이다.
그는 자신의 고국인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감독을 맡으면서 박지성과 이영표를 유럽에 데뷔시켰다. 송종국과 김남일도 네덜란드에서 뛰었다. 이후 많은 선수가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으로 꾸준히 한국 축구의 영역을 넓혔다.
큰 무대를 밟아본 선수들이 차곡차곡 쌓은 경험이 훗날 한국 축구 발전의 밑거름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인재'로 습득한 문화와 노하우, 기술은 결코 쉽게 쌓이지 않지만, 한 번 체화되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대통령의 네덜란드 국빈 방문을 계기로 가시화한 '한-네 첨단 반도체 아카데미'에 적지 않은 기대를 걸고 있다. 양국이 공동성명에도 명시했듯, 정부-기업-대학의 삼각 편대가 함께 힘을 모아 '반도체 동맹'(semiconductor alliance)을 형성한 데 이어, 인재 교류 중심의 협력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내년부터 운영하는 첨단 반도체 아카데미는 미래 반도체 인재 양성을 위한 인재 교류 프로그램이다. 올해 반도체특성화대학원으로 선정된 한국과학기술원, 성균관대, 울산과학기술원의 석박사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추진한다.
앞으로 5년간 총 500명 학생이 양국을 오가며 첨단 반도체 산업 현장과 연구 현장을 경험하게 된다. 네덜란드에서는 아인트호벤 공과대학, 장비 제조 업체 ASML이 교육 주체로 참여한다.
글로벌 종합 반도체 회사를 두 곳이나 보유한 한국의 제조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네덜란드에는 극자외선(EUV) 기반 리소그래피(실리콘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 모양을 새기는 작업) 장비를 생산하는 세계 유일의 기업 ASML이 있다.
공급망에서 반도체 제조 기업과 장비를 만드는 기업은 싫든 좋든 공생 관계다. 게다가 반도체는 산업 특성상 고가 장비를 사줄 기업도, 만들 기업도 몇 군데 없기는 마찬가지다. 한국과 네덜란드 모두 서로에게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한 파트너라는 점에서 인재 교류의 긍정적인 시너지가 예상된다.
또, 반도체는 전기·전자, 통신, 소재 등 다양한 분야의 최신 지식이 통합적으로 필요한 첨단 분야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등에 활용돼 미래 산업의 향방을 좌우할 핵심 기술이기에 경쟁도 치열하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이론을 심도 있게 배우는 것만으로는 현업에 투입하기 어렵다. 제조 공정을 실제 눈으로 확인하면서 배운 이론을 직접 적용해 봐야 한다.
첨단 반도체 아카데미의 교육 프로그램은 다양한 실습 과정으로 구성했다. 첨단 반도체 기술 트렌드 특강 이외에 학생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고성능 반도체 장비 생산 현장을 방문해 견문을 넓히고, 제한된 시간에 기술 애로를 해결하는 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역량을 키울 수 있다.
이번 인재 교류 협력은 양국 정부 차원에서 전략적인 필요와 관심에 따라 합의된 사안이다. 우선 일주일 일정의 교육부터 시작되지만, 향후 '반도체 동맹'에 걸맞은 수준으로 확대 운영될 것이다.
오늘 씨를 뿌렸다고 해 당장 내일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경험과 역량을 갖춘 현장형 인재를 키우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네덜란드 같은 장비 강국과의 인재 교류는 고급 현장 지식과 연구 노하우를 효율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첨단 반도체 아카데미를 수료한 학생들이 앞으로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를 주도하는 인재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bjmin@kia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