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소수의 온라인 플랫폼을 사전에 지정해 비즈니스를 규제하는 플랫폼 경쟁촉진법(이하, 플랫폼법) 추진에 나서자, 벤처 투자자와 학계 등에 이어 스타트업들도 반대하고 나섰다.
공정위는 유럽의 플랫폼 규제 법안을 본떠 매출과 이용자 수, 시장점유율 등을 바탕으로 특정 조건을 초과하는 플랫폼 기업을 지배적 사업자로 지정해 규제할 방침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소수의 플랫폼 사업자만 겨냥해 경쟁을 촉진하고 작은 기업의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취지와 달리, 스타트업들 사이에서 작은 기업들의 성장과 인수합병 기회를 모두 막을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26일 벤처업계에 따르면 최근 공정위가 추진하는 플랫폼법과 관련, 스타트업 사이에서 “구글이나 메타같은 글로벌 기업을 잡으려는 법으로 한국 플랫폼을 잡으려 하냐”는 식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정위는 매출과 시장점유율, 이용자 수 기준을 정해 독과점을 막기 위해 플랫폼 사업자를 선정, 자사우대·끼워팔기·멀티호밍·최혜대우 등 4가지 항목에서 규제하는 법안을 추진할 방침이다. 그러나 규제가 도리어 국내 토종 스타트업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직방의 여선웅 전 ESG담당 부사장은 최근 본인 SNS에 “네이버 빼고 모든 플랫폼 기업이 망해가고 있는데, 무슨 플랫폼 경쟁 촉진법이냐”며 “유럽이 빅테크 규제하는 이유도 구글, 메타, 넷플릭스 잡으려는 것이고, 유럽은 IT기업이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규제가 아니라 자국 기업 보호주의”라고 말했다.
직방은 600만 명 이상이 설치한 국내 1위 부동산 플랫폼 스타트업으로, 여 전 부사장은 청와대 행정관·쏘카 본부장을 역임했다.
그는 “토스는 지난해 2472억원의 적자를 냈고, 컬리는 지난해 2335억원의 적자를 냈다”며 “독점이라는 카카오모빌리티의 작년 영업이익이 195억원으로 중견기업 수준도 안 된다”고 꼬집었다.
배달의 민족은 지난해 4000억원의 이익을 냈지만, 코로나 특수가 끝나면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 하는 가장 '불투명한 기업'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1~3분기 누적 벤처투자액은 7조6874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5% 감소했다. 투자 건수도 지난해 5857건에서 5072건으로, 기업당 투자 유치 금액도 32억2000만원에서 25억9000만원으로 6억3000만원 줄어들었다.
앞서 스푼라디오 최혁재 대표도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정부에서 만든 규제나 법률로 항상 피해를 보는 것은 국내 기업들”이라며 “글로벌 빅테크들은 항상 교묘하게 빠져나간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이 법에서 해외 기업들은 또 제도권 밖”이라고 질타했다.
그는 “누굴 위한 정책이고 누굴 위한 법안인지 울분이 터지고 답답하다. 혜택이나 특혜를 달라는게 아니다. 공정하게 경기를 뛰고 싶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리한 경기는 제발 그만하고 싶다는 하소연”이라고 말했다.
오디오 라이브 방송 플랫폼인 스푼라디오는 현재까지 약 670억원을 투자받은 국내 대표 온라인 스타트업 중 하나다.
그는 “온플법(플랫폼법)에서 메타, 아마존, 애플 등 해외 기업은 제도권 밖인데, 이런 회사를 견제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시총과 비교해 수십배 수백배 작은 네이버·카카오·배민·직방·당근 같은 회사들만 피해볼 것”이라고 썼다.
스타트업 관련 인사들이 플랫폼법에 반대하는 이유는 공정위가 벤치마킹한 유럽연합이 전 세계 시가총액 5위권 이내의 미국 기업들을 주로 규제대상으로 선정한 반면, 한국은 이와 유사한 법으로 한국의 토종 기업들을 규제할 방침이기 때문이다.
EU는 올해 디지털시장법(DMA)을 제정, 유럽 내 연 매출 75억유로(10조6000억원), 시가총액 750억 유로(106조원), 월간 플랫폼 이용자(4500만 명), 3개국 이상 진출 조건으로 사전 규제 기업을 선정했다.
달러 기준으로 애플(시총 1위·3조), MS(2위·2.7조), 알파벳(4위·1.7조), 아마존(5위·1.5조), 메타(7위·9081억)와 전 세계 17억 명이 사용하는 틱톡(바이트댄스·비상장)이다.
유럽 기업은 한 곳도 없었다. 강형구 한양대 교수는 “카카오·네이버·두나무 등 7개 IT기업의 합산 매출이 미국 구글과 아마존 등 5개사의 2.9%에 불과하다”며 “어설프게 해외 법을 베껴 성장해야 할 국내 기업을 압박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국내 주요 벤처투자자들도 공정위의 플랫폼법에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당근, 하이퍼커넥트 등에 투자한 소프트뱅크벤처스 이준표 대표는 본인 SNS에 “현재 추진되는 플랫폼경쟁촉진법이 그대로 도입되면 IT산업과 스타트업 생태계의 경쟁력이 전체적으로 위축되고, 오히려 외국 플랫폼 기업에게 반사이익을 얻게 해 결국 국가적 손실로 이어질 것”이라며 “네이버, 배민, 쿠팡 등 국내 테크 기업만 대상으로 무작정 고민이 덜 된 규제를 하면 누가 큰 그림을 보고 한국 스타트업에 투자하겠냐”고 말했다.
쿠팡과 배달의 민족에 초기 투자한 알토스벤처스 김한준 대표도 “작은 회사들이 새로운 쿠팡·배민·네이버·카카오가 되기 더욱 힘들고 한국에 투자하는 돈은 정부 돈만 남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스타트업계의 '대부'로 불리는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는 SNS에 “국내 정치인이 해외 대기업을 이롭게 하며, 국내 기업 족쇄 채우는 법을 만드는 걸 반복하고 있다”고 썼다.
벤처업계에선 플랫폼법 시행으로 인수합병이나 상장 등 최첨단 산업을 주도하는 미국 실리콘밸리식의 기업 혁신과 엑시트(exit) 문화가 실종될 것을 우려한다.
우선 공정위가 정한 특정 매출이나 이용자 수 이상으로 넘어가면 규제를 받게 된다. 스타트업 입장에선 성장의 상한선이 그어진다는 것이다.
또 규제로 사세가 위축된 네이버나 카카오 등 주요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의 스타트업 인수합병(M&A) 흐름이 중단될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창업 3년 만에 이용자 수 10만 명을 넘긴 한 명품 플랫폼 A사 대표는 “스타트업은 상장 아니면 인수합병이 유일한 엑시트(EXIT) 방법인데, 우리 같은 플랫폼 기업은 당연히 플랫폼 기업과 시너지를 낼 수밖에 없다. 투자업계 돈맥경화 속 느닷없는 규제정책”이라고 말했다.
벤처 투자자와 스타트업들은 “가뜩이나 대외환경이 어려워 창업자들이 줄어가는 상황에서 공정위의 규제 추진이 찬물을 끼얹은만큼 우리도 관련 법 제정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확산 중이다.
벤처 투자 정보업체 더브이씨(THE VC)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이달 23일까지 개업한 스타트업은 95개사로, 지난해 322개보다 70.5% 감소했다. 2021년(579개)과 비교하면 83.6% 줄어든 수치로 업계에선 투자와 규제 환경 악화를 주요 원인으로 뽑고 있다.
전자신문인터넷 이상원 기자 slle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