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 자동차 업계가 들썩였다. 지난해 4분기 중국 비야디(BYD)의 전기차 판매량이 52만대를 기록하면서 48만대에 그친 미국 테슬라를 앞질렀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난해 1분기 세계 자동차 수출국 1위에 올랐고, 화웨이·샤오미 등 정보통신기술(ICT) 기업까지 자체 브랜드 전기차를 내놓고 있다.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중국은 전기차와 배터리를 10대 핵심 산업으로 선정하고 지난 2015년 '중국제조 2025'에 반영했다. 친환경 자동차 생태계 정비를 위해 완성차-배터리-핵심 광물 채굴제련에 이르는 생산 공정을 계열화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정부 주도로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우리나라를 위협할 수준까지 올라왔다고 진단한다.
국내 제조산업 경쟁력이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후발 주자에 따라잡힐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주력 제조업 업그레이드와 첨단 산업 육성이 함께 이뤄져야 하지만, 그동안 대기업 중심으로 펼친 강력한 산업정책 동력이 약해지면서 비즈니스 생태계가 침체한 데다 인재 부족마저 겪고 있다. 한국식 성장 모델은 효용을 다했다는 '피크 코리아'(peak korea)도 거론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의 2020년 세계 제조업경쟁력지수(CIP)에서 4위에 올랐다. 하지만 10~20년 후에도 이런 경쟁력을 유지할지는 의문이다. 한국이 국제적 역할과 위상에 걸맞은 글로벌 제조산업 중추 국가 반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직된 노동 시장을 바꾸고, 불합리한 규제를 개선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대한민국이 매력적인 시장이자 제조산업 선도 국가로 인식되고, 우리나라 기술과 인재를 세계가 주목하는 핵심 자원으로 두드러지도록 하는 '필살기'와 같은 매력 강조 전략이 필요하다.
2024년, 우리나라 경제 매력도와 선택 지수를 높이는 이른바 'PICK' 전략을 제안코자 한다. PICK으로 요약한 네 가지 키워드는 국내 제조업의 혁신과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해 정부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전략이기도 하다.
첫 번째 P는 '생산성'(Productivity) 향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추정한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2001년 5%대, 2015년 3%대에서 지난해 1.9%로 주저앉았다.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동, 자본, 기술혁신 등 요소 투입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 제조업에서 생산성 향상은 결국 혁신적 기술이 신속하게 사업화돼야 가능하다. 산업 현장에 필요한 인재와 자본이 빨리 유입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사업화를 가로막는 규제를 걷어내는 일도 시급하다.
두 번째 키워드인 I는 '통합적 지원'(Integrated support)이다. 주요 국가는 자국 산업 기반 육성을 위해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도 국가첨단전략산업 및 소재부품장비 특화단지를 지정해 행정 편의, 세액공제, 연구개발 등 종합 지원 세트를 제공하고 있다. 입주 기업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더욱 과감한 조치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예컨대 일본 정부는 구마모토현에 대만 TSMC의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자그마치 4조원이 넘는 보조금을 지원했다. 공사 기간도 5년을 예상했지만 24시간 3교대 공사를 진행해 2년 만에 마쳤다. 인근 대학에는 반도체 학과를 신설했다.
차제에 인재 유치에도 파격적 수준의 종합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퇴직 인력, 여성 인력, 해외 인재를 적극적으로 산업 현장에 받아들이고 활용해야 저출생 고령화로 노동인구 급감에 직면한 우리나라 제조업에도 승산이 있다.
C는 '협력'(Cooperation) 전략을 말한다. 세계화 시대가 저물었다고는 하지만, 경계를 허무는 협력으로 시너지를 창출하는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다. 글로벌 기술 경쟁의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특정 기업이나 한 국가의 역량만으로는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기업 간, 산-학-연 간 원팀을 이루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 대 국가 간 협업 관계 형성도 필요하다. 지난해 우리나라와 네덜란드가 반도체 동맹을 선언한 것이 대표 사례다. 첨단 반도체 산업에서 약점은 보완하고 강점은 극대화하는 상생의 파트너십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과 교류하며 국적을 초월한 국제협력 연구를 강화하는 것도 앞으로는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마지막으로 K는 공급망 불안을 해소해주는 '지원'(Keep stability)이다. 최근 중국의 요소 수출 통제에서도 볼 수 있듯, 지속가능한 제조 기반 구축에 정부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공급망을 주도하는 핵심 광물과 핵심 기술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에 정부 지원이 집중돼야 한다.
이는 곧 튼튼한 첨단 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해 정부의 꾸준한 지원이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캐나다가 인공지능(AI) 강국으로 꼽히는 배경에는 198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연구를 지원한 정부의 결단이 있다. 민간 R&D를 이끌어내고 중장기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부 R&D 투자는 앞으로도 힘있게 추진돼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경제에 활력 제고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대미 자동차 수출은 2015년 이후 8년만에 100만대를 돌파하며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반도체 역시 오랜 부진을 깨고 지난해 11월부터 가파른 수출 실적 상승세를 타고 있다.
연구개발(R&D)에 대한 열정도 식지 않아 다행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매년 국내 R&D 투자액 상위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스코어보드를 조사해 발표하고 있다. 지난 2022년 R&D 투자 1000대 기업의 투자액은 전년 대비 10.5%(6조3000억원) 늘어난 66조7000억원으로 집계됐다. R&D 투자액 증가율이 두 자릿수를 기록한 것은 지난 2013년 이후 처음이다. 최근 10년간 최고 증가율을 보였다.
새해가 밝았다. 2024년 올해는 갑진(甲辰)년으로 청룡의 해라고 한다. 푸른색은 생명력과 희망을 의미한다. 용은 언젠가 하늘로 오를 수 있다는 이상을 갖고 살아가는 동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 경제가 갑진년, 청룡의 좋은 기운을 받아 올 한 해 희망을 안고 멋지게 비상했으면 한다.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bjmin@kiat.or.kr
〈필자〉 전문 과학기술인으로 시작해 국회의원, 기관장으로 선임된 인사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치·정책 분야까지 확장했다. 1959년생으로, 이화여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일본 규슈대에서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원자력연구소에서 근무하다 1991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최초의 여성 유치 과학자로 입소했다. 이후 20년간 국내 원자력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과 한국원자력학회장도 역임했다. 2022년 9월부터 KIAT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민간 주도 성장 전략을 뒷받침할 정책을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