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은 새 부대'라는 속담이 있다. '술을 새로 담궜으니 기분 좋게 새 부대자루에 담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실 이 속담은 새 술의 강한 발효성 때문에 나온 말이다. 갓 담군 새 술은 발효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낡은 부대자루에 넣을 경우 자루가 터져서 술도 버리고 자루도 버릴 수 있다. 그래서 새 술의 강한 발효성에 버틸 수 있는 새 부대자루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새 술이 '변화와 혁신'이라면 새 부대자루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와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변화와 혁신을 줄기차게 부르짖은 나라도 흔치 않다. 그러나 피로감이 느껴질 정도로 외쳐온 수 많은 시도 중 제대로 성공한 게 몇 번이나 되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새로운 시도 자체가 쉽지는 않다. 변화에 대한 공감대도 얻어야 하고 어떻게 혁신할지 방향성도 정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변화와 혁신적 시도들이 용두사미로 끝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새 부대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새로운 제도와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제도와 시스템은 일종이 관습이자 사회적 습관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시스템을 유지하면 새 술과 낡은 부대의 궁합이 맞지 않아 결국 새 술을 버리게 될 수 있다.
국가 연구개발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개발하겠다, 10년 안에 대한민국에서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나오게 하겠다, 이런 야심찬 목표를 가지고 수많은 변화와 혁신을 시도해 왔지만 막상 이러한 변화가 현장에서 추진될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을 제대로 마련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틀에서 새로운 꿈을 꾼다면 그 꿈은 실현되기 힘들다. 제조업의 관점에서 디지털 서비스업의 특성을 이해하기 힘들고, 개발시대의 규칙으로 연구개발을 한다면 선진국을 능가하는 세계적 선도기술을 개발하기 힘들다. 학력고사 공부를 하고 수능시험을 치고, 수능공부를 하고 본고사 시험을 볼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의 제도가 변하고 시스템이 전환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에도 그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변화와 혁신을 부르짖어 왔다. 수사학적 레토릭으로서 그리고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 '변화와 혁신'이 소비되어 왔지만, 공부에 왕도가 없듯이 변화와 혁신에도 왕도가 없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연구개발에도 다음과 같은 시스템 혁신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첫째, 뛰어난 민간전문가가 도전적 R&D 프로젝트를 소신을 가지고 추진할 수 있도록 전권을 줘야 한다. 미국 DARPA(미국방위고등연구계획국)처럼 민간전문가 소신을 가지고 변화를 견인할 수 있도록 혁신의 놀이터를 만들어줘야 한다. 민간전문가가 연구개발을 관리하는 제도는 형식적으로는 도입되어 있지만 충분한 권한위임을 제대로 한 적은 없었다. 민간전문가가 변화와 혁신을 시스템화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둘째, R&D는 실패가 기본이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고, 실패가 두렵다면 어떠한 변화도 이룰 수 없다. 실패를 비난하고 처벌하는 현재의 평가체계를 바꿔서, 평가자가 조력자이자 러닝메이트로 프로젝트를 지원사격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평가수를 줄이고 제대로 된 평가가 될 수 있도록 충분한 자원을 배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셋째, 국가 R&D예산의 10% 정도는 도전적 R&D에 배정해야 한다. 이제는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제대로 된 사업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정적 예산확보를 통해 시스템 혁신이 꾸준히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변화와 혁신과 관련된 약속은 대부분 멋지게 들린다. 그러나 그 과실을 누리기 위해서는 더디고 지루한 시스템 혁신을 피할 수 없음도 알아야 한다. 이제라도 제도와 시스템을 차근차근 고쳐나가는데 우리의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이다.
안준모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joonmo@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