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울산과학기술원(UNIST) 총장이 '대한민국 연구중심대학 2.0 육성 전략'을 제시했다. 목표는 '세계적인 대한민국 연구중심대학 만들기'다. 기술 패권 시대에 인류의 삶을 바꾸는 혁신적 과학기술 성과는 대부분 세계 일류대학에서 나온다는 판단에서다.
이 총장은 개인 희생 속에서 빠르게 기술을 습득해 국가 발전에 기여한(패스트 팔로어) 기존 연구중심대학을 1.0으로 규정하고, 이제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만큼 과학기술혁신을 선도하는(퍼스트 무버) 연구중심대학 2.0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구중심대학 2.0 육성 전략의 요지는 연구몰입 환경 조성이다. 이 총장은 직접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 중국, 싱가포르 등 주요국 연구개발(R&D) 정책과 연구중심대학 육성 현황을 파악했다. 장단점과 결과물을 우리나라 대학과 비교 분석해 이번 육성 전략을 수립했다.
이 총장은 연구몰입 환경 조성을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을 만들기 위한 핵심 조건이라고 했다. 연구자와 연구장비, 지원 인력을 갖춘 '연구 플랫폼 구축'과 투자 자율성에 기반한 '대학 재정 확대'를 연구몰입 환경 조성 필수요건으로 꼽았다.
이 총장은 “말로만 과학기술 육성과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외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부터 실행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연구중심대학 2.0 육성 전략을 수립했다”고 강조했다.
UNIST는 연구중심대학 2.0 전략과 관련 자료를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연구중심대학과 연구중심대학 2.0 개념은.
▲연구중심대학은 연구를 통해 교육하는 대학이고 연구중심대학 2.0은 선진국형 연구중심대학 지원 체계다. 선진국형 연구중심대학은 국가 차원의 연구를 이끌 수 있고 그에 맞는 연구와 교육 역량을 갖춘 고등교육기관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연구몰입 환경 조성과 국제화를 이뤄내고, 최우수 연구자들이 재직하며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대학, 다시 말해 세계 대학평가에서 상위권에 있는 대학이다.
우리나라도 이제 세계적 연구중심대학을 보유해야 할 시기다. 하버드대 의대 연구실에서 시작한 모더나와 모더나 백신 개발 사례에서 보듯이 세상을 혁신하는 기술은 세계적 연구중심대학에서 나온다.
-왜 지금 연구중심대학 2.0을 주창하나.
▲우리나라 대학과 세계 주요대학 간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격차는 결국 기술과 산업 경쟁력 차이로 나타난다. 연구논문 영향력 세계 1%에 드는 최상위 연구자(Highly Cited Researcher, HCR)는 현재 우리나라가 총 70명(중복포함)으로 중국 칭화대 한 곳(73명)보다 적다. 칭화대는 2003년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벤치마킹하러 왔었다. 또 KAIST를 벤치마킹해 1991년 설립한 싱가포르 난양공대는 2023년 세계대학평가 QS랭킹에서 19위에 올랐는데 KAIST는 40위권이다. 해외 선진국은 한국에 어떤 우수한 대학이 있는지, 어떤 학교가 뛰어난지 잘 모른다.
-우리나라 대학 경쟁력이 떨어진 이유는.
▲재원 부족과 이에 따른 연구몰입 환경 부재, 낮은 대학 자율성 등 다양한 원인에 기인한다. KAIST 설립과 함께 1970년대에 만든 우리나라 연구중심대학 육성 시스템은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다 보니 여전히 연구자 개인에게 집중돼 있다. 대학 본부와 연구자 간 '미스 매치'가 생겼고 '가난한 대학 본부'는 연구장비를 구매하거나 전문 관리 인력을 육성할 여력이 없다.
HCR 수를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세계 17위지만 세계 17위 한국 대학은 없는 이유다. 결국 연구자가 연구 외적 업무 부담까지 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 연구자 개인 육성뿐만 아니라 '대학' 육성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대학에 투자하면 장기적으로 연구자에게도 이득이다.
특정 분야나 특정 연구자에게 연구비를 몰아준다고 해서 성과도 비례해 나타나지 않는다. 연구몰입 환경, 즉 연구 전반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시스템 구축(대학)에 투자해야 하고, 잘 갖춰진 시스템의 혜택은 다수 연구자에게 돌아간다.
-연구중심대학 2.0 육성 전략을 요약하면.
▲미국을 비롯해 유럽과 싱가포르, 중국 등이 보유한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의 경쟁력을 파악해 이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연구자가 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연구 장비까지 관리하는 70년대식 개도국 연구개발 지원 방식을 벗어나 선진국형 지원체계를 갖추자는 얘기다. 미국에서는 연구자가 과제 영수증을 볼 일이 없다. 대학에 지원하는 연구비를 늘리는 과감한 정책적 결단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 연구개발 예산은 GDP의 5%인 연 100조원 정도인데 이 가운데 대학에 투입하는 예산 비중은 9.1%로 10조가 채 안 된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는 전체 연구개발비 예산이 각각 56조원, 71조원으로 우리나라보다 작지만 20% 이상인 13.2조, 14.3조원가량을 대학에 투입한다.
우리 정부가 대학에 투입하는 연구개발비를 2% 포인트인 약 2조만 늘려도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 육성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우리나라 수준의 국력과 경제 규모를 볼 때 일류 연구중심대학 10개 정도는 육성해야 한다.
-결국은 예산 확보 문제로 보이는데 기존 대학지원사업과 차별화는.
▲예산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대학에 선별 지원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선진국형 연구중심대학의 조건인 연구몰입 환경과 국제화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 정확하게 평가해 지원해야 예산 투입과 성과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기존 사업단(교수 개인) 중심의 연구과제 수행과 관리를 대학 본부 중심으로 통합 조정하고, 관행적 다수 분배 위주의 사업이 아닌 선도적인 소수에 집중 투자하는 것도 필요하다. 정부 차원의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 육성 방안으로 현재 초광역권에 하나씩 있는 4대 과기원부터 시작해 성공 모델을 만들어가면 지역 균형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연구개발 사업에서 간접비 비율 상향과 정률제를 강하게 주장했는데.
▲간접비는 현 상황에서 대학이 스스로 연구몰입 환경을 조성하는데 투입할 수 있는 유일한 재원이다. 하지만 기금이나 기부금이 매우 부족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학 발전에 투자할 수 있는 유일한 재원인 간접비 확보마저 제약이 많다.
유럽의 경우 대학이 재량껏 쓸 수 있는 '일반대학진흥기금'이 따로 있고, 미국은 전체 연구비의 35%를 간접비로 책정한다. 우리나라는 총연구비의 18~23% 정도인데 그마저도 간접비 책정 비율을 지키지 않고 임의로 낮출 수 있어 문제다. 연구를 수행하는 대학의 재정 운용에 보탬이 되기 위해 선진국의 정률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본다.
-PBS(연구과제중심)를 도전적 융합연구를 가로막고 만성적 인건비 적자만 남기는 제도라 비판했다.
▲PBS는 정부 출연연 연구자의 인건비를 일부만 지원하고 나머지는 연구과제에서 충당하도록 하는 제도다. 이러한 PBS 아래서는 돈이 안 되는 분야, 즉 기초과학이나 인문 분야 연구자를 채용하기가 쉽지 않다. 당연히 기초 연구나 새로운 융합연구 도전에 어려움이 따른다. 현재 우리나라 과기원 교수 TO당 책정하는 인건비는 미국 대학 조교수 평균 연봉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적어도 70~80% 수준은 돼야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을 따라갈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대학 연구비 부족으로 대학원생, 박사후연구원(포스닥)의 처우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 초급 연구자인 대학원생과 포스닥 연구원은 대학 연구의 기반인데 삶의 질은 심각한 수준이다. UNIST가 석사 과정생 최저 인건비를 80만원 책정하니 국내 최고 수준이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원의 현주소다. 국내 이공계 대학원생은 최저 시급의 반도 안 되는 급여로 주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 포스닥 연구원 월급도 미국이나 싱가포르의 절반 수준이다. 해외 우수 포스닥 연구원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학에 오는 연구비가 부족하니 학생 인건비를 올려 처우를 개선하는 것도 어렵다. 인건비가 최저시급에 못 미치니 학생이 오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 육성이 이공계 학생 이탈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인가.
▲현재 남아 있는 인재들에게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30만명 고교 졸업생 가운데 상위 1만명이 의약 계열로 빠져나가도 상위 10%는 여전히 훌륭한 이공계 인재 후보다. 더 큰 문제는 이공계 입학생 상당수가 졸업 후에는 다른 분야로 진출한다는 데 있다. 이공계 미래 비전이 그리 밝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부가 최근 이공계 대학원생 연구생활 장학금 확대 등 처우 개선 정책을 제시해 다행이다. 한발 더 나아가 사회적 최저 인건비 확보는 물론 우수 과학기술 연구자를 우대하는 정책 강화가 시급하다. 중국의 '천인 계획', '만인 계획'같은 과학기술 인재 유치와 육성 정책을 필요에 따라서는 모방할 필요도 있다. 나이에 상관없이 상위 10% 과학기술자를 선정해 석좌교수로 지정하거나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우대 제도 도입을 검토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이용훈 UNIST 총장은〉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니아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주립대 교수로 5년여 활동하다 1989년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로 임용돼 ITRC센터장, 신기술창업지원단장, 정보기술 BK사업단장, 공대학장, 정보과학기술대학장을 지냈다. 2011~2013년 교학부총장을 역임했고, 2019년 11월부터 UNIST 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 이사, 한국공학한림원 부회장, 수소경제위 위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제5차 과학기술기본계획 수립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울산=임동식기자 dsl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