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균은 몸 전체가 하나의 세포로 이뤄진 작은 미생물이다. 유산균처럼 우리 몸에 이로운 세균도 있지만 결핵, 파상풍, 콜레라 등 수많은 질환을 유발하는 해로운 세균이 많아 보통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곤 한다.
그런데 이런 세균이 최근 인간의 손에 의해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바이오 연료를 만들고, 동물 희생 없는 배양육 연구를 이끌며 각종 소재를 생산하는 세포공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생명체 구성 요소와 시스템을 재설계하는 합성생물학의 등장 덕분이다.
합성생물학은 기존의 생물학에 표준화, 부품화, 모듈화 등 공학적 개념을 결합한 학문이다. 유전체 수준에서부터 특정 기능을 디자인·설계하고, 이를 바탕으로 필요한 DNA, 인공세포(생명), 단백질 등을 제작·테스트하여 원하는 기능을 구현한다.
이런 식으로 특정 기능을 강화한 세균은 향후 질병 치료 및 헬스케어 연구에 큰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합성생물학으로 여드름 치료하는 세균 등장
최근 스페인 폼페우 파브라대의 마크 귀엘 박사팀은 여드름 제거에 효과적인 분자를 생산하는 세균을 개발해 국제학술지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에 발표했다.
여드름은 모낭의 막힘이나 염증으로 인해 발생하는 흔한 피부 질환이다. 주로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 발생해 큰 스트레스를 안겨주곤 한다.
여드름이 생기는 과정은 이렇다. 원래 피지는 피부를 촉촉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데 사춘기 호르몬 변화, 유전적 요인, 스트레스, 식이 등의 이유로 피지 분비량이 과도하게 증가하면 문제가 된다. 과도한 피지가 모공을 막아 정상적으로 배출되지 못하고, 이곳에 여드름균이 증식한다.
여드름균은 '큐티박테리움 아크네스'로 사실 우리 피부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세균이다.
평소에는 다양한 단백질을 분비해 면역 체계를 활성화하거나 피부 수분 손실을 막는 등 피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피지가 과도하게 증식하면 큐티박테리움 아크네스가 피지를 먹으면서 증식한다.
이때 큐티박테리움 아크네스는 지방분해효소를 분비하는데, 지방분해효소가 지방을 지방산으로 분해한다. 이 지방산이 모낭을 자극해 염증을 일으키면서 여드름이 생긴다.
심한 여드름은 약물로 치료하는데 주로 항생제와 '이소트레티노인'이라는 피지 제거 성분이 사용된다. 항생제는 여드름균을 죽이는 목적으로, 이소트레티노인은 피부조직의 안과 밖에서 피지를 분비하는 피지 세포를 없애기 위해 사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두 약물 모두 원하는 세균과 세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피부에 존재하는 유익한 세균과 일반 세포들에도 영향을 미쳐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합성생물학을 이용해 여드름을 일으키는 주범인 큐티박테리움 아크네스를 여드름을 없애는 치료사로 바꾸기로 했다. 우선 이소트레티노인과 그 작용 메커니즘에서 힌트를 얻었다. 이소트레티노인은 'NGAL'이라는 단백질을 분비해 피지 세포를 제거한다.
연구진은 큐티박테리움 아크네스가 바로 이 NGAL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도록 유전자를 바꿨다.
그리고 NGAL을 분비하는 큐티박테리움 아크네스를 실험실에서 배양한 인간의 피부 세포에 테스트한 결과 48시간 후 피지 세포가 분비하는 피지 수치가 절반 줄었다.
연구진은 쥐를 이용한 실험도 진행했는데, 쥐의 모낭에서도 변형된 큐티박테리움 아크네스가 생존하고 NGAL을 정상적으로 분비하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연구진은 쥐의 피부는 사람과 크게 다르므로 여드름에 미치는 영향은 테스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향후 임상 연구를 통해 변형된 큐티박테리움 아크네스가 실제 인간 피부에 어떠한 효과를 보이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크 귀엘 박사는 “우리는 여러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든 세균을 변형할 수 있는 플랫폼 기술을 개발했다”며 “앞으로 큐티박테리움 아크네스를 아토피성 피부염을 해결하기 위한 치료제로도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코로나19 대응에도 큰 힘… 관련 시장 급상승
이외에도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최근 각광받고 있는 mRNA 백신 역시 합성생물학이 활약하는 분야다. mRNA는 단백질 생산에 있어 설계도와 같은 역할을 한다.
특정 바이러스의 유전정보를 담은 mRNA를 체내에 집어넣으면, 면역계가 그에 대응하는 항원을 만들도록 유도할 수 있다. mRNA 백신은 유전정보만 확보하면 분리·정제 등 복잡한 과정을 제치고 백신을 개발할 수 있어 코로나19를 신속하게 대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모더나, 화이자 등이 인공 합성 mRNA을 기반으로 백신을 개발했다.
이렇게 합성생물학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관련 시장 역시 급성장하고 있다. 매킨지글로벌연구소에 따르면 오는 2026년 해당 분야 시장 규모는 288억달러(약 38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비즈니스 리서치 컴퍼니는 2030년 합성생물학 시장 규모에 대해 약 616억달러(약 82조원)라는 전망을 내놨다.
현재는 미래 시장 선점을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합성생물학 연구.생산 플랫폼을 구축한 아미리스(Amyris), 효소 엔지니어링에 강점을 보이는 코덱시스(Codexis), 역시 자체 세포 엔지니어링 플랫폼을 보유한 징코 바이오웍스(Ginkgo Bioworks) 등 미국 바이오테크 기업이 한 발짝 앞서가는 모양새다. 이에 질세라 독일, 영국, 일본, 중국 등도 합성생물학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바이오파운드리 구축 시작
국내에서도 이를 추격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 중이다. 지난 1월 16일 '바이오파운드리 인프라 및 활용기반 구축 사업'이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했다. 한국 정부는 2025년부터 2029년까지 5년간 총 1263억원을 투입해 바이오파운드리를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바이오파운드리는 설계에서부터 제작, 테스트까지 바이오테크 전 단계를 자동화한 초고속 시스템·인프라를 뜻한다. AI와 로봇을 적극 활용해 DNA 합성·조립, 대규모 테스트 등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다.
바이오 연구, 특히 합성생물학 연구는 수많은 반복 실험과 데이터 처리가 중요한데, 이를 지원함으로써 연구의 효율성을 크게 높이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일부 민간 기업을 제외하곤 대부분 국가 주도로 바이오파운드리를 구축 운영해 자국 바이오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고속도로, 항공망이 구축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의 물류·교통을 비교할 수 없듯이 앞으로 바이오파운드리는 합성생물학 연구를 위한 기초 인프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생물체의 원하는 기능을 유전체 단계서부터 설계하고 이를 구현하는 세상, SF 속 신세계가 아닌 현실로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글: 김청한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