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시대에 접어들면서 슈퍼컴퓨터는 국가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학기술 연구, 산업 분야 활용, 사회 문제 해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슈퍼컴퓨터 수요가 늘면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국은 슈퍼컴퓨터 분야에서 어떤 역사를 만들어 왔으며, 현재 어떤 위치에 서 있을까?
◇1988년 1호기 도입부터 5호기 누리온까지
국가 슈퍼컴퓨터의 역사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하 시스템공학센터(향후 SERI로 확대)가 도입한 'Cray-2S'가 한국 최초의 슈퍼컴퓨터였다.
CPU 4개, 메모리 1기가바이트(GB)로 이뤄진 Cray-2S의 성능은 2기가플롭스(GFlops)로, 오늘날의 스마트폰보다 못한 성능이었지만 당시에는 국내에 있던 그 어떤 컴퓨터보다 성능이 좋았다. 또한 Cray-2S의 가격은 약 2600만달러로, 당시 물가 수준으로도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한국 최초의 슈퍼컴퓨터는 김포공항에서부터 서울 홍릉에 있던 KIST까지 국빈급 경호를 받으며 운반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Cray-2S는 다방면에서 폭넓게 활용됐는데, 특히 국산 자동차 설계와 제작에 큰 도움을 줬다. 기아, 대우, 쌍용 등 당시 자동차 기업들은 슈퍼컴퓨터 1호기를 활용해 차량 충돌, 엔진과 타이어 설계 등의 시뮬레이션을 수행했는데, 이 덕분에 개발 기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슈퍼컴퓨터 1호기가 한국을 자동차 강국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슈퍼컴퓨터의 도입 덕분에 한국은 과학적인 일기예보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기상학자들은 기상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치예보 모델을 만들어 일기예보를 한다. 수치예보 모델은 엄청나게 복잡한 역학 및 물리 방정식을 계산해야 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데 슈퍼컴퓨터 덕분에 30시간이 걸리던 작업을 1시간 만에 할 수 있게 됐다. 또 1989년 9월 태풍 '베리'와 1991년 9월 태풍 '미어리얼'의 진로를 정확히 예측해 인명·재산 피해를 크게 줄이면서 일기예보의 정확도를 크게 높일 수 있었다.
이후 2001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출범하면서 슈퍼컴퓨터의 도입과 활용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KISTI는 국가 차원에서 슈퍼컴퓨터의 도입과 운영을 결정하며, 슈퍼컴퓨팅 자원을 보유하고 관련 인프라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슈퍼컴퓨터 3호기로 '노벨(IBM p690)'과 NEC SX-5/6를,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4호기인 '타키온(SUN Blade6048, 6275)'과 '가이아(IBM p595, p6H)'를 도입했다. 한국의 슈퍼컴퓨터는 꾸준히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며 우주탐구, 핵융합, 단백질 구조 분석 등 거대연구는 물론 금융과 컴퓨터 그래픽스 등 다양한 응용 분야에 활용되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현재 한국은 보유 대수 기준으로는 세계 7위, 성능 기준으로는 세계 9위의 슈퍼컴퓨터 강국이다(2023년 11월 기준). 네이버, 삼성 등의 대기업이 높은 성능의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고 기상청도 자체적으로 슈퍼컴퓨터를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
국가 차원의 슈퍼컴퓨터로는 2018년 도입된 5호기 '누리온(Cray CS500)'이 사용되고 있다. 누리온의 성능은 25.7페타플롭스(PFlops)로, 이는 70억명이 420년 동안 계산해야 할 양을 1시간 만에 처리할 수 있는 속도다. 도입 당시 전 세계 슈퍼컴퓨터 11위에 오를 정도로 높은 성능을 보여줬다.
◇누리온을 통해 알아보는 슈퍼컴퓨터의 구조
그렇다면 슈퍼컴퓨터는 일반 컴퓨터와 어떻게 다를까? 누리온을 통해 슈퍼컴퓨터의 구조를 살펴보자. 슈퍼컴퓨터는 '노드'라는 기본 단위로 이뤄져 있다. 각 노드는 CPU, 메모리, 저장 장치 등을 포함하고 있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컴퓨터라고 할 수 있다.
누리온은 이런 노드가 총 8437개나 된다(8305개 매니코어 CPU 노드, 132개 범용 CPU 노드로 구성). 병렬 프로그래밍에 따라, 각 노드들은 동시에 작업을 수행한다.
슈퍼컴퓨터는 운용체계(OS)도 우리가 쓰는 컴퓨터와 다르다. 슈퍼컴퓨터의 운용체계로는 보통 리눅스를 쓴다. 윈도나 맥OS처럼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가 아니라, 명령어를 입력해 사용하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각 노드들은 '인터커넥트'라는 고속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인터커넥트는 데이터, 명령어, 결과 등을 빠르게 전송해 슈퍼컴퓨터 전체의 통신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기에, 슈퍼컴퓨터의 전체적인 성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누리온은 100Gbps 속도의 인터커넥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또 슈퍼컴퓨터는 대규모 데이터를 처리하기 때문에 저장 용량도 그만큼 커야 한다. 누리온은 33.88페타바이트(PB)의 저장 용량을 갖고 있는데, 이는 HD 해상도의 영화를 675만 편 저장할 수 있는 양이다.
마지막으로 슈퍼컴퓨터에서 노드만큼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냉각장치다. 슈퍼컴퓨터는 방대한 양의 CPU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발열량도 어마어마하게 크다. 그래서 슈퍼컴퓨터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냉각이 필수다. 물이나 액체를 사용해 식히거나, 쿨러를 사용해 공기로 냉각시키는 등 여러 가지 냉각 방법이 있는데, 누리온은 물을 이용한 수냉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AI, 빅데이터 시대를 위한 6호기 도입 필요성
2018년부터 지금까지 누리온은 과학기술 연구, 산업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현안을 해결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며 국가 경쟁력을 극대화하는 핵심 도구로 기여하고 있다. 다만 슈퍼컴퓨터는 매년 발전 속도가 빠르기에, 누리온도 도입 당시와 비교하면 성능 순위에서 크게 밀리고 있다.
해외에서는 슈퍼컴퓨터의 발전속도와 운영 효율성을 고려해 4~5년 주기로 교체하고 있는데, 누리온은 벌써 6년이 지난 상황이다. 게다가 워낙 수많은 연구기관과 기업 등이 사용하고 있다 보니 시스템 용량의 70~80%를 넘게 사용하고 있어 이미 과부하 상태다.
바이오, 천체물리 등의 분야에서 거대 과제가 많아지면서 슈퍼컴퓨터에 대한 수요는 더욱더 늘어나고 있으며, 특히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인공지능(AI) 분야의 수요에 대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에 KISTI는 2023년부터 6호기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전 세계 10위권 성능의 슈퍼컴퓨터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88년 1호기 도입 이후 35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슈퍼컴퓨터 성능을 크게 높여왔다. 이는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성과이기도 하다. 앞으로 슈퍼컴퓨터는 AI, 빅데이터 등의 핵심 기술과 융합하며 지금보다 더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을 이끌어내며 미래 과학기술 발전의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투자와 기술개발을 통해 슈퍼컴퓨팅의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고, 한국이 슈퍼컴퓨터 선도 국가로 도약하길 기대한다.
글: 오혜진 동아에스앤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