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액만 올랐다고 무슨 중견기업입니까. 원자재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상품 가격이 올랐고, 덩달아 매출이 늘었을 뿐입니다. 중소기업 분류 기준이 2016년에서 멈춰 있다보니 (매출이 오른) 일부 중소기업은 세제지원이나 중소기업 혜택까지 받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현실에 맞는 중소기업 관계법 개편 논의가 시급합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이 현실에 맞지 않는 중소기업 관계 법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원자재 가격 상승과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하고 있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법령과 제도가 발목을 잡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해외로 눈을 돌리지만, 중소기업 수출을 명확히 규정하는 법령도 미흡하다. 이 사이 다른 나라들이 경쟁에 참전하면서 우리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게 현실이다.
◇2016년 정한 기업 분류 기준 제자리…원자재 가격 상승에 中企 '비명'
정부는 2016년부터 소기업까지 전체 기업을 판단하는 기준을 근로자·자본금에서 매출액을 기준으로 전면 변경했다. 중소기업 지위를 유지하려고 근로자를 늘리지 않는 '피터팬 증후군'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기업 분류 기준을 매출액으로 개편한 것이다. 이에 근로자·자본금 대신 평균매출액에 따라 업종별 5개 그룹으로 분류했다. 매출액이 경기변동에 민감한 지표임을 고려해 기준 적정성과 타당성을 매 5년 단위로 검토해 조정한다는 조항도 포함했다.
문제는 5년 단위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데 있다. 평균매출액 기준 역시 2016년 당시와 동일하다. 이 사이 원자재 가격은 매년 급상승했다. 이에 연동해 매출도 올랐지만, 이익은 도리어 줄어든 경우도 많다. 직격탄을 맞은 대표업종이 원자재가 비중이 높은 전선·건설산업이다.
전선업은 구조적으로 동, 구리 등 원자재가 매출 90%를 차지한다. 국가 전력 인프라와 연동돼 안정적인 사업을 영위할 수 있지만, 마진은 크지 않다. 동, 구리 등 원자재 가격은 최근에도 급상승하고 있고, 이로 인해 매출액까지 덩달아 늘었다. 한국비철금속협회에 따르면 지난 4일 기준 전기동 가격은 8437달러로 4918달러이던 2016년(3월 4일 기준)보다 71.5%나 올랐다.
건설업체도 건설 주요 자재인 시멘트와 레미콘 가격이 줄지어 오르면서 상황이 다르지 않다.
매출액이 갑작스럽게 늘면서 중견기업으로 분류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전환되면 세제·중소기업 혜택 등을 누릴 수 없다. 중소기업계는 3년 평균매출액을 분류 기준으로 정한 현재 법령을 재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업계 의견은 배제된 상황이다.
한국전선공업협동조합 관계자는 “글로벌 이슈 등으로 원자재 가격이 널뛰기하는 상황에서 일률적으로 평균매출액만을 따지는 현행 기준은 애먼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오르는 문제를 야기한다”면서 “업종에 따라 예외규정을 두거나 과거처럼 근로자를 포함하고, 매출액 중 하나라도 기준을 충족하면 중소기업으로 남을 수 있도록 법령을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급변한 현실, 과거에 머무른 법령이 혁신 '발목'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법령도 보완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중소기업들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 해외진출을 타진한다. 일례로 중소기업 대부분이 부품을 간접수출하는 방식을 쓰고 있는데, 수출 관련 법령이 부재하다 보니 실태파악이나 지원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현재 중소기업 관계 법령에는 국제화란 넓은 개념만 포함돼 있다. 수출을 명확하게 규율하는 개별법이 부재한 상황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중소기업 해외거점 확보·변경 또는 국내 복귀가 이뤄질 수밖에 없는 만큼 중소기업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정부가 이를 지원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한다는 게 전문가 의견이다.
디지털 전환 등 혁신 지원을 위한 규정도 시급하다. 현재 중소기업의 스마트공장 전환 또는 스마트제조 혁신을 지원할 목적으로 '중소기업 스마트제조 혁신 촉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지만, 제조현장 디지털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제조 현장에만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인공지능(AI), 데이터 활용, 초개인화 마케팅 등 혁신을 지원하기엔 한계가 있다. 이에 디지털 또는 온라인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비대면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비대면 중소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최세경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모든 가치사슬 측면에서 디지털 전환을 통해 혁신을 이끌어야 하지만, 현재 중소기업에 대한 디지털(관련 법령은) 스마트제조 등 제조에 초점이 맞춰진 게 현실”이라면서 “빅데이터, AI 등 디지털 관련 구체적인 혁신을 이끌어가는 관점이 법령으로 이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윤호 기자 yuno@etnews.com, 송윤섭 기자 sy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