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고등학생의 학부모가 됐다. 초등 1학년 시절의 오랜 인연을 맺어온 엄마들도 같은 날 고등학생의 학부모 대열에 합류했다. 그중 마음 터놓고 지내던 엄마와 안부를 나눴다. 또래를 키운다는 건 공통된 대소사와 어려움을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중인지라 구구절절한 하소연 없이도 단단해지게 마련이다.
아이들끼리는 소원해진 지 이미 오래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어렵게 지속 중인 직장에서 최근 몹시 억울한 일을 겪고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후배들과 팀원들은 그녀가 이대로 관둬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생각해, 본인은 꺼낸 적도 없는 사표를 들먹이며 걱정을 시작하더란다. 아무리 힘드셔도 이대로 그만두시면 안 된다고, 어렵겠지만 잘 이겨내시라고 격려한다. 그런 이들에게 깔끔한 대답으로 주변을 일순간 안심시켜버렸는데.
“제가 관둘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요, 고등학생 엄마 됐거든요. 매달 나가는 학원비가 얼만데 그만둬요. 절대 안 그만둬요. 아니, 못 그만둬요. 애 초등 때 이런 꼴 당했으면 진작에 사표를 던졌겠지만 지금은 사표라는 선택지가 아예 없어졌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동갑내기를 키우는 내게도 고스란히 닥친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난 7년 동안 쉼 없이 출간해온 나는 이쯤 하면 쉴 때도 되지 않았냐는 주변의 우려와 반대로, 최근 두 달에 걸쳐 올해와 내년에 출간 예정인 책들의 계약을 줄줄이 잇고 있다. 출판사의 예산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최대한의 선인세를 요구하는 뻔뻔함도 마다하지 않는다.
빚을 졌고, 글로 갚아야 한다. 나도 고등학생 엄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에게 학원은 소질 계발이나 취미 생활이 아니고, 고등 아이의 부모에게 사교육비는 선택 사항이 아닌 수도세 등의 관리비처럼 고정 지출 항목이 된다. 관리비가 적게 나오는 집도 있을 것이고, 때로 좀 낮은 달도 있듯 가정마다 시기마다 금액의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사교육비 통계를 애써 들먹일 필요도 없이 대학 입시를 목전에 둔 고등학생의 평균 사교육비는 기록을 갈아치우며 치솟고 있다. 고등 준비를 위해 드나들었던 대치동 학원가는 예상보다 훨씬 더 다양한 강의와 프로그램으로 가득했다. 테트리스 게임을 하듯 방학 중 학원 일정을 썼다 지우고를 반복하며 고심하는 엄마들은 그곳의 흔한 풍경이다. 비단 대치동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고등학생과 학부모의 불안한 심리를 꿰뚫어 보는 학원가의 마케팅이 학원비 결제로 연결되는 건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 전국 어디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직장을 이어가고, 적어도 3년은 더 버티어보기로 다잡은다. 낯선 업무임에도 다만 몇 시간이라도 일할 곳을 알아본다. 제안받은 일은 수락이 기본값이라는 심정으로 달려드는, 어쩌면 일생 최대의 업무 의욕을 내뿜는 시기가,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라는 사실은 대한민국만의 씁쓸한 교육 현실을 반영한 듯 하다.
그 어떤 대학도 대학 간판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이러는 고등 학부모가 있겠는가. 한 등급이라도 올려보겠다며 애쓰는 아이가 안쓰럽고 기특한 마음에 필요하다는 학원이라도 보내주는 부모가 되자는 소박한 각오일 뿐이다. 그렇게 버틴 시간을 통해 경력이 더해지고, 성과를 인정받고, 몰랐던 적성을 발견하고, 전문가가 되어간다. 배우는 돈이 급할 때 연기를 제일 잘한다던 윤여정 님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이은경 교육전문가
◆이은경 교육전문가 =15년간 초등 교사로 활동. 현재 부모교육전문가, 저술가, 강연가, 유튜버 등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이은경쌤의 초등어휘일력 365' '초등매일 글쓰기의 힘' '초등 자기주도 공부법' 등이 있다.
마송은 기자 runni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