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언제 철학으로부터 독립했을까? 과학은 철학에서 독립할 처지가 못 됐었다. 과학은 그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는 정도를 말할 뿐, 그 경향의 불변성이나 보편성은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나는 반대로 흐르는 물의 기적을 본 일이 있다”고 주장하는 큰 목소리 앞에서 과학은 무력했다. 한편 수학은 과학이 아니고 철학이었다. 철학의 복잡한 논리를 간명하게 서술하는 수학은 철학의 언어였다. 2500년 전 플라톤은 아카데미아 정문에 이렇게 적었다. “수학과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통과할 수 없다.”
아이작 뉴턴은 명저 프린키피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통해 그동안 복잡하게만 보이던 해와 달과 별을 포함한 모든 움직이는 물체의 만유인력과 운동법칙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식으로만 표현해 반론이나 논쟁의 여지를 말끔히 제거했다. 비로소 과학은 철학에서 독립했다. 17세기 과학혁명의 출발이다.
오바마도 극찬했다는 리우츠신의 SF 소설 '3체'가 넷플릭스 영화로 나와 인기다. 뉴턴 법칙은 상호작용하는 두 물체 사이의 중력과 운동의 법칙을 완벽히 설명했다. 세 물체 사이의 상호작용도 그 작동원리가 같을 것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세 별의 운행궤도를 알려줄 '신의 방정식'은 없다. 난제 중 난제다. 앙리 푸앵카레는 아예 이 3체 문제의 수학적 일반해가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전자가 하나뿐인 수소의 원자 모형은 만들 수 있지만, 원자번호 2번 전자가 둘인 헬륨부터는 원자 모형도 못 만든다는 뜻이다. 자연법칙은 그대로지만 신이 향하는 다음 발길은 예측할 수 없다. 카오스 이론은 이 지점에서 탄생한다. '수학적 예측'이 불가능할 뿐 '신의 섭리'는 정연하다.
SF 영화 '3체'는 태양이 3개인 행성에 사는 3체 문명과 전쟁 이야기다. 낮도 없고 밤도 없다. 4계절은 물론 없다. 3체 태양이 언제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다. 불사막이 하루아침에 빙하기로 접어든다. 천문 관측을 통한 과학 발전은 어렵고, 생명과 문명은 생성과 파멸을 반복한다. 태양신의 뜻을 알 수 없으니 종교와 철학 발전도 쉽지 않다. 간신히 진화를 이룬 3체인들은 좀 더 살만한 다른 태양계로 이주할 계획을 세운다. 운 좋은 지구인은 평화롭고 예측가능한 '1체' 태양계에 태어나 간명한 '2체' 문명을 쉽게 건설했다.
지구인의 하늘에 태양은 하나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2체' 문명 능력을 과신하고 마치 신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오만하고 독선적인 광기를 뿜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도 비슷하다. 둘 사이의 관계는 언제 어디서와, 어디로 흘러가는 중인지 어렴풋 알 만하다. 하지만 셋만 돼도 어느 순간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다. 대응할 기회도 없는 속수무책이다. 3각 관계 속 삶은 어렵고 고되다. 시절이 참으로 하수상하다. 신냉전이라더니 세상이 둘로 쪼개지는 중인지 셋으로 쪼개지는 중인지조차 알 길이 없다. 오래된 한국의 양당 정치체계도 분열하며 예측 불가능성을 계속 높이고 있다.
보통의 직장인은 위로부터 짓눌리고 아래로부터 치받친다. 업무에서는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 끼인 '3체' 상황에서 그날그날 변화에 대응해가는 고된 삶이다. 한편 고도로 분화된 몇 전문직은 특정 고객군의 특정 문제들을 반복 해결하는 '2체 문제' 해결사들이다. '2체 문명'은 삶의 원칙에 대한 신념을 강화한다. 의사는 환자에 대한 확고한 신념체계를 갖고, 검사는 피의자에 대한 확고한 신념체계를 갖는다. 평소에는 본업에 충실할수록 평화롭고 예측가능한 삶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강한 신념의 '2체문명'과 '2체문명' 사이의 충돌은 파국적이다. 그들의 하늘에 태양은 오직 하나다. '신과 나'로 정의된 종교 문명 속 신앙생활은 평화롭고 신성하다. 강성한 두 종교 문명 사이의 충돌은 늘 완전한 파국을 향한다. 그런데 우주에는 태양이 두 개 이상인 항성계가 오히려 더 많다. 태양이 하나뿐인 우리 인류가 우물안 고집쟁이 개구리일 뿐이다. 아, 3체 문제라고 모두 못 푸는 건 아니다. 3체가 대칭을 이루는 라그랑주 포인트에 도달하면 중력이 사라지는 평형점을 만난다. 우리가 이해 못한다고 신의 섭리, 프린키피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 상상력을 발휘하여 무너지기 시작한 문명을 업그레이드할 때다.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정신과전문의 juha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