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사가 다국가 임상시험에서 한국을 점차 '패싱'하고 있다. 임상 비용이 상승한 데다 분산형 임상시험 등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틈을 노려 중국, 싱가포르 등이 무섭게 추격하면서 글로벌 임상시험 선도국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2일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 등에 따르면 지난해 화이자, BMS, 노바티스, 로슈 등 글로벌 제약사가 다국적 임상시험 프로젝트 10여 건을 비용과 규제 등 이유로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지난해 글로벌 제약사 A사는 다발성 경화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3상을 한국에서도 진행하려 했지만 결국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미국, 호주, 브라질, 캐나다, 프랑스, 튀르키예 등 12개국에서만 진행키로 했다. B사 역시 우리나라에서 암이나 악액질, GDF-15 호르몬 농도 상승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신약 임상 2상을 병행할 계획이었지만 검토 끝에 미국, 중국, 일본, 대만, 호주 등 12개국에서 진행 중이다.
이외에 C사는 습성 연령 관련 황반 변성 환자를 대상으로 한 다국적 임상 3상을 계획하면서 한국은 관련 인프라 부재로 시행 대상 국가 검토도 하지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제약사들의 한국' 패싱' 사례가 알려지지 않았을 뿐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글로벌 임상시험 시장에서 국가 기준 5위, 도시 기준으로는 1위(서울)에 오를 만큼 시장을 주도했지만 갈수록 매력이 떨어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갈수록 높아지는 국내 임상시험 비용이 원인이지만, 실제로는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규제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2022년을 기점으로 글로벌 제약사는 물리적 거리에 제약 없는 '분산형 임상시험(DCT)'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환자 모집부터 검체 획득, 모니터링 등 임상시험 과정을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원격으로 진행하는 시스템이다. 특히 다국가 임상시험에서 다양한 참가자 모집과 비용 절감, 환자 편의성 증대, 중앙 집중형 관리 등 장점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약사법 등에 의거 의료기관 내에서만 임상시험이 허용돼 사실상 불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대만, 싱가포르 등은 발빠르게 움직여 글로벌 제약사 임상시험 수요를 빨아들이고 있다. 싱가포르는 2020년 일찌감치 분산형 임상시험 규정을 마련했고, 중국과 대만, 말레이시아 등도 지난해 지침을 발표해 전격 허용했다.
특히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의료 서비스와 제약산업 육성 방안으로 글로벌 임상 유치를 꼽고,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는 상황이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2022년 기준 제약사 주도 임상시험 국가와 도시별 임상시험, 단일국가 임상시험 모두 세계 2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우리나라 역시 분산형 임상시험 허용을 위한 제도 검토와 시범사업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약사법 등 관련 법령 정비가 필수로 수반돼야 하는 만큼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백선우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 본부장은 “글로벌 제약사는 분산형 임상시험을 늘려 환자 모집과 모니터링 등에 효율성을 제고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도 지난해부터 논의가 시작된 만큼 이른 시일 내 제도를 정착해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용철 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