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정부 신뢰 회복 이뤄져야”
“연구자들이 이제 한 해를 바라보고 사는 한해살이가 된 것 같다.”
R&D 예산 삭감, 의대 증원, 이공계 인재 이탈 등 최근 일련의 사태를 지나온 한 과학계 인사의 푸념이다. 21일 '과학의 날'을 맞아 과학계 목소리를 모아본 결과 과학계의 가장 큰 우려는 R&D 예산 삭감이다.
이준호 전국대학기초과학연구소연합회장(서울대 기초과학연구원 원장)은 “(R&D 예산 삭감에서) 가장 큰 문제는 소액과제를 대부분 일몰시켰다는 점이다. 교육부에서는 학문균형발전이라는 연구를 통째로 날렸다”며 “그 안에 비전임교수가 많이 참여하는 창의도전, 보호학문, 융복합, 지역우수연구자 등 관련 과제들이 들어있는데 나눠먹기식 과제는 안된다는 명분으로 일몰시켰다”고 말했다.
남은 과제 역시 흔들리고 있다. 일괄적인 예산 삭감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원장은 “평가 기준도 없이 이전 과제들을 일괄적으로 10~20% 삭감했다는데 왜 깎였는지 이유도 모른다”며 “기존에 진행하던 과제들의 경우 당장 연구비 10~20%가 사라진 것인데 내년에 또 깎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기면서 신뢰가 깨져 버린 것이 문제”라고 했다.
연구 인력 이탈도 과학계의 어려움 중 하나다. 이필호 기초과학 학회협의회장(강원대 화학과 교수)은 “의대 증원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늘게되면서 연구 인력 이탈 쓰나미가 올 것 같다”며 “예산이 줄면 대학원 진학률도 낮아지고 지역거점국립대는 대학원생 부족으로 큰 타격을 입게될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더 강경한 목소리도 나온다. 신명호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과기노조) 정책위원장은 “최근 대통령실에서 증액하겠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문제가 됐던 부분을 복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겠다고 하는 것만 진행한다는 것으로 읽힌다”며 “R&D 삭감 과정 전반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해 위법 사안에 대해 관계자 처벌까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기노조는 과학의 날에 맞춰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컨트롤타워 부재를 꼽는 의견도 있다. 이어확 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동조합(과기연전) 수석부위원장은 “이전에는 법 규정에 따라 어느 시점이 되면 논의 시작, 국무회의 보고, 기재부 해당 사안 전달 등 시스템이 정해져 있었는데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무너졌다”며 “필요한 연구를 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실에서 지시하는 과제에 키워드만 끼워 넣고 진행하는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 됐다”고 호소했다.
따라서 과학계와 정부 간 신뢰 회복은 최우선 과제로 보인다. 이 원장은 “깨진 신뢰 회복이 필요한데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며 “구멍 난 곳을 채우면서 최소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액션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보호학문이나 소액과제 등은 명칭을 바꾸더라도 일정 부분 회복시키지 않으면 학문 생태계가 위험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R&D 예산 복원도 중요하지만 같은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이 수석부위원장은 “연구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일정 비율을 정해놓으면 기재부 입김이 줄어들고, 국가 미래를 위해 필요한 분야에 연구를 정할 수 있다”면서 “그 예산 중 20%는 시대 흐름에 맞춰 연구를 하라고 한다면 연구 균형도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 정책위원장은 “국회에 과학기술예산을 다루는 과학기술처를 상설기구로 설립해 국회에서 지속적으로 R&D 예산을 모니터링 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행정부가 마음대로 돈을 쓰는 것을 통제하고 효율적으로 예산을 관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지희 기자 eas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