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전문가들이 세탁기야말로 여성을 빨래 노동에서 해방시킨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이야기한다. 또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는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성공을 가져온 주요 요인으로 에어컨을 꼽기도 했다. 에어컨 덕분에 창문을 통해 말라리아 모기 등 열대 해충이 집안에 들어오지 않게 되어 열대지방에서도 고밀도 도시를 구축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냉장고는 식품 저장과 유통, 식품위생·식품안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가전제품이며 이제는 냉장고가 없는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자동차 등 교통수단과 더불어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는 인류의 삶 자체를 혁신한 제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편리함이 있으면 아쉽게도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이 모든 가전제품은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기 콘센트에 코드를 꼽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전기는 대부분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발전소에서부터 전선을 타고 우리 집까지 오게 된다. 내가 가전제품을 사용하면 저 멀리 있는 화력발전소에서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와 미세먼지를 배출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간접배출이라 하고, 간접배출을 줄이기 위해서는 내가 가전제품을 덜 사용하든지, 아니면 고효율제품을 구입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뭔가 불편하다. 편하게 살기위해 산 세탁기나 에어컨을 이산화탄소 때문에 두 번 쓸 것을 한 번 쓰거나 상대적으로 비싼 고효율제품을 사야만 하는가? 게다가 기후변화 때문에 여름이 더욱 덥고 길어지고 있는데 에어컨이나 냉장고 사용을 줄여야 하는가? 물론 소비자 역시 탄소배출에 책임이 있다. 그렇다고 소비자에게 탄소배출 감축을 위해 전기를 조금만 쓰라고 무작정 요구할 수 없다.
그래서 자본과 기술이 있는 제조업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제조업체는 절전형 고효율 제품을 제조해 가급적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이 최고의 기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비자에게 탄소감축 노력을 격려하고, 그 노력의 대가를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과거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인도에서 고효율 냉장고의 제조 및 판매를 통해 유엔기후변화협약 청정개발체제의 탄소배출권 사업을 성공시켜 탄소배출권을 확보한 바 있다. 10여년 전에는 소비자들의 행동변화와 그에 따른 탄소배출 감축 실적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방법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그래서 탄소배출권이 소비자가 아니라 제조·판매업체에 귀속되는 청정개발체제를 추진했다.
이제는 이와 같은 소비자 행동 변화에 따른 탄소배출 감축을 탄소배출권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제도와 방법론이 구축돼야 한다. 국내 가전제품 제조업체는 이미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 수준, 탄소배출권 확보를 위한 기획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를 탄소배출권 사업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정부가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독려한다면, 에너지를 절약하는 소비자에게 노력의 결실이 탄소배출권 또는 그 판매 수익으로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탄소감축 방법론을 수립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냉장고 같이 24시간 사용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 에어컨의 경우는 세밀한 접근을 해야한다. 집 에어컨을 끄고 주변 커피숍에서 시원하게 시간을 보낸다면 정말 탄소배출 감축이 될까? 그렇지 않다. 커피숍 에어컨을 고객 수나 당일 날씨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저온 강풍으로 틀어둔다면 탄소를 과잉 배출하는 것이다. 마치 쓰레기를 종량제봉투를 이용하지않고 공중휴지통에 버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세부 쟁점까지 보완해 표준화된 감축 방법론을 수립해야만 소비자의 에너지절약 및 탄소감축 촉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용진 KIS자산평가 ESG사업본부장 yongjin.park@kispricing.com
이준희 기자 jh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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