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번호표를 받아든 듯 줄줄이 닥쳐오는 기념일 중 유독 바쁘고 뿌듯하면서도 서운하고 민망하기도 한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하루가 있다. 그렇다, 어버이날이다. 사춘기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맡겨진 주부의 역할을 빠듯하게 해내느라 매일 저녁 거실을 종종거리지만, 동시에 저 멀리 시골에서 나이 들고 약해지는 생애 주기의 부모님 네 분의 자식이기도 하다. 나름의 자식 도리를 하느라 현금을 챙겨 들고 출발했던 고속도로를 나물과 과일을 잔뜩 싣고 되돌아오는 주말은 충분히 흡족하고 뿌듯했다.
하지만 나도 부모라는 사실을 만끽하고 싶었던 어버이날이 되자 아이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늦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오리고 붙인 서툰 카네이션과 삐뚤삐뚤한 글씨의 깜찍한 손편지를 기대한 건 물론 아니었다. 빨강, 초록의 색종이와 고운 카네이션 편지지를 미리 준비해주시던 섬세하고 다정한 담임선생님은 초등학교에만 근무하신다는 사실을 중학생 학부모가 되고야 깨닫고는 지난 어버이날들을 새삼스레 감사해했다.
중고등학생의 학부모가 된 지금, 내가 어버이날에 기대한 건 안 그래도 수시로 드나드는 편의점에서 엄마, 아빠를 위한 커피 하나를 더 결제해 들고 들어오는 최소한의 주변머리였다. 내 기대가 과한 것인가, 아니면 주변머리를 키워주지 못한 내 잘못된 교육 탓인가. 이 아이들이 못 배운 채로 바쁘게 시간이 흘러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어른으로 살아갈 팍팍한 하루를 상상하다 보니 엄마의 서운함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심란함으로 번졌다. 이런 아이들의 엄마인 나는 이 시대의 교육에 관해 말할 자격이 있기나 한 사람인가.
그렇게 한 며칠이 지났을까. 고등학생 큰아이와 같은 반 한 아이의 엄마로부터 불쑥 연락이 왔다.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는 사이다. 내게 너무도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신다. 그 집 아이가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복도에 주저앉아 꼼짝을 못했는데, 그 아들을 부축해 꽤 멀리 떨어진 보건실로 데려다준 마음씨 고운 학생이 내가 한 며칠 노려보며 개탄하던 우리 집 이 아이라는 것이다. 매일 보는 아이지만 학교에서의 일들은 언제 들어도 낯설다.
되짚어보니 아이가 친구를 도왔던 그 날은 공교롭게도 5월 8일이었다. 늦은 밤까지 농구공을 던지다 들어와 배고프다는 말만 했던 그 날의 아이는 어버이날이라는 걸 까맣게 잊은 평범한 사춘기 아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날의 아이는 급식실로 질주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가던 길을 멈춰 배를 붙들고 아파하는 친구에게 돌아가 어깨를 내민 특별한 학생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성장할수록 그들의 시선이 끝없이 바깥을 향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기특하고 서운하다. 안전하고 편안한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기 위해 나름의 힘을 다하는 모습이 고맙고, 바짝 세운 안테나를 밖으로만 뻗어가는 모습이 문득문득 낯설다. 하지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양육의 순리이고 목적지라면 엄마의 서운함이 대수일까. 부모의 도움만을 바라던 아이가 누군가를 선뜻 도울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까짓, 어버이날 못 받아먹은 편의점 커피가 대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