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삶의 질을 가장 높인 것은 무엇일까. 20세기까지로 한정했을 때 미국 공학한림원은 자동차나 비행기가 아닌 '전기화(Electrification)'를 1위로 꼽았다.
전기화는 에너지(동력)를 전기 형태로 공급·소비하는 일련의 변화를 의미한다. 등잔불로 지내던 산골 마을에 전깃불이 켜진 것, 가솔린 엔진차가 전기차로 바뀌는 흐름이 전기화다. 세계 최초 중앙집중식 상업용 발전소로 인정받는 토머스 에디슨의 맨해튼 발전소에서 전기를 첫 생산한 1882년을 전기화 시작이라고 보면, 전기화 역사는 이미 140년을 넘었다.
당시 전기화를 본격 도입한 산업 분야는 조명이다.
등유와 가스 등 화석연료를 이용하던 조명은 에디슨의 전구와 발전기로 대체됐다. 이를 시작으로 증기기관이 전기모터로 대체되면서 동력의 전기화는 더 빠르게 진행됐다. 이는 20세기를 주도한 산업화와 전력망 확장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과정을 1차 전기화 시기라 부른다. 전기화 확산으로 에너지 사용 편리성과 효율성도 계속 높아졌다.
21세기 전기화는 수송(전기차·전기선박), 생산공정(저온·중온 공정의 전기화), 건물설비(전기 히트펌프 등)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하고 있다. 2차 전기화다.
20세기 1차 전기화 지향점이 효율성 향상이었다면 21세기 2차 전기화는 탄소중립을 주요 수단이자 목표로 삼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기화로 인한 세계 이산화탄소(CO₂) 감축량이 전체 감축량 대비 20%를 차지하고, 그 비중은 2050년 27%로 확대될 것이라 전망했다.
2차 전기화에 따른 전력 증가는 최종 용도(End-use) 관점에서 탄소 감축 효과가 있지만, 전력 생산을 위한 발전 부문의 탄소 발생량은 증가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예를 들어 전기차를 많이 보급하면 수송 부문 탄소 발생량은 줄어들지만, 전력수요가 늘어난만큼 발전원을 더 늘려야 한다. 바꿔 말해 수송 부문 탄소 발생 부담을 전력 부문으로 전가하는 구조다.
전력 부문에서는 이러한 부담을 무탄소 전원 보급 및 운영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다. 재생에너지는 물론, 최근 활발한 소형 모듈형 원전 개발과 보급 확대도 그 사례다.
IEA는 2010년 전체 발전량의 20% 수준인 재생에너지 비중이 2050년 88%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에 현재 재생에너지의 단점인 간헐성을 극복하기 위해 인공지능(AI)을 비롯한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을 결합한 유연 분산 에너지 시스템이 주목받고 있다.
수송, 공정, 설비 분야의 2차 전기화는 우리 사회가 탄소중립을 달성하고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구축할 때까지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7번째 탄소 배출국으로 앞으로 에너지 수요는 계속 증가할 전망이다. 전력 부문은 물론 관련 연구기관, 기업, 정부까지 탄소중립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 장기적이고 대규모로 투자와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이유다.
2차 전기화 목표인 탄소중립을 구현하고 나면 전기화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아마도 전기화는 다른 형태로 지속될 것이고 이를 3차 전기화로 구분할 수 있다.
3차 전기화는 초연결 사회를 위한 전력 공급망이 핵심이다. 탄소중립 이후 전기화는 지능화된 초연결 사회, 즉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촘촘한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것이 지향점이다. 사람과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지능·초연결 사회는 수많은 지능화된 디바이스가 필요하고 단위 디바이스마다 전력을 공급해야 한다.
지능·초연결 사회를 향한 3차 전기화 시대에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움직이는 전력 시스템'이 필요하다. 움직이는 전력 시스템이란 고정된 발전-송전-배전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고 모든 디바이스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2차 전기화 과정에서 이차전지를 이용한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시스템(ESS)이 나왔지만 지능·초연결 사회에는 고도의 기술 혁신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차전지의 경우 소형·경량·안정·고밀도화 기술 혁신이 필수다. 이차전지는 3차 전기화 시대에 반도체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육상, 해상, 항공 모빌리티의 전동화, 대규모 ESS 활용, 초소형 사물인터넷(IoT) 디바이스 등 지능·초연결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차전지는 필수 에너지원이 된다. 다양한 수요처에 적합한 형태와 특성을 지닌 고성능 이차전지 개발은 그만큼 중요하다.
엣지 디바이스 기반 IoT 생태계 구축을 위한 '에너지 하베스팅' 기술 고도화도 필요하다. 에너지 하베스팅은 사용 전력을 주변 환경(열·진동·빛 등)에서 획득하는 기술이다. 지능·초연결 사회의 모든 디바이스마다 별도로 전력을 공급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무선 전력전송 기술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전력 공급의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무선 전력전송은 현재 휴대폰 충전 등 제한적 용도와 짧은 거리에서만 활용되고 있다. 전송 거리와 전력량을 늘리면 산업용 센서, 드론, 의료기기, 전기차 충전, 재난 구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다.
육상에 집중된 모빌리티 전기화의 해상 및 항공으로 확산에 대응해 전동기, 발전기, 동력전달 시스템 등 차세대 전기 모빌리티 통합 추진체계도 개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3차 전기화 시대에는 새로운 전력운영시스템이 필요하다. 전력운영시스템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이 만든 '가장 거대한 시스템'으로 불린다. 현재 전력운영시스템은 3차 전기화 시대에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3차 전기화 시대 전력운영시스템은 연결된 에너지와 연결되지 않은 에너지, 즉 다양한 에너지원을 관리 운영하는데 따른 부하에서 자유롭게 전력을 주고받으며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존과 전혀 다른 시스템 운영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산업화 및 개발도상국 단계에서 발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효율적인 기술 개발과 경제 성장을 달성해왔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수송 분야 전기화에서 이차전지산업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기업의 높은 경쟁력은 이미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퍼스트 무버)의 모습이다.
하지만 전력산업으로 눈 돌리면 탄소중립을 위한 2차 전기화 과정에서도 선도자로 불리기에는 크게 부족하다. 3차 전기화 시대를 맞이한 지금, 지능·초연결 사회를 지향하는 전략 수립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전력운영시스템 고도화 등 선도적 기술 개발에 집중해 전기화 선도국으로 도약해야 한다.
김남균 한국전기연구원장 nkkim@keri.re.kr
〈김남균 원장은〉
차세대 전력반도체 분야 전문가다. 1984년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한국전기연구원에 입사했고, 이후 전기차 에너지 효율을 크게 높이는 '탄화규소(SiC) 전력반도체' 국산화 개발에 성공해 기술이전까지 완료했다. 전력반도체연구센터장, HVDC연구본부장, 연구부원장과 원장 직무대행을 역임하며 원내 연구역량 강화를 이끌었다. 대외적으로 탄화규소(SiC) 연구회 초대 회장을 지냈고, 현재 한국전기전자재료학회 부회장, 한국세라믹학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과학기술훈장 도약장(2018년), 한국전기전자재료학회 자랑스러운 전기전자재료인상(2022년)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