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2일 미국 존스홉킨스대 '탄소중립 산업정책연구소'에서 '한국 반도체 제조업체가 녹색 반도체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작년 반도체 불경기로 국가 경제가 크게 어려웠고 이제야 회복 되려는 분위기인데 한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이 낮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나오자 국내외 이목이 집중됐다. 게다가 해당 내용만 떼어놓고 보면 국내 반도체 기업이 재생에너지 확보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고 질타하기에 딱 좋다.
그러나 보고서에는 더 깊고 많은 내용이 담겼다. 한국은 첨단 제조업을 기반으로 청정에너지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으므로 에너지 분야에서 중추적인 중견국가라고 평가했다. 반면 신냉전 시대가 열리면서 자동차·배터리·반도체 공급망에서 청정에너지 경쟁, 급속히 변화하는 지정학적 이슈와 보호무역주의로 한국 경제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강대국 결정에 의해 모든 것이 좌우돼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느낌 마저 든다. 하지만 보고서 저자들은 반도체 시장 내부에 한 걸음 더 들어가 자세한 분석을 했다.
특히, 최근 재생에너지 가격하락에 따른 비용절감효과, 그리고 애플·마이크로소프트(MS) 등 주요 반도체 구매업체의 탄소저감 요구에 따라 녹색 반도체로 전환이 반도체 기업의 경쟁우위 요소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드는 초기부터 재생에너지와 에너지저장장치를 활용한 전력공급 체계를 갖추는 것이 장기적으로 비용측면에서 점점 유리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대만, 중국과 같은 반도체 경쟁국들이 자국기업에 유리한 탄소국경조정 정책을 적용하게 되면, 한국의 탄소집약적인 반도체 수출에 불리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았다. 대만 TSMC와 미국의 인텔이 재생에너지를 적극적으로 확보하는 사례도 소개했는데, 국내 대표 반도체 제조업체의 재생에너지 확보 비율과 비교해 실적면에서 크게 앞서 나가고 있다. 보고서는 재생에너지 공급이 가능한 곳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반면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기 녹록지 않다. 에너지는 매우 중요하지만 에너지는 입지를 결정하는 많은 변수 중의 하나다. 기술개발과 장비구매, 우수인재 확보에 너무나 많은 돈이 필요하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돈을 전부 재생에너지 확보에 쓸 수는 없다. 재생에너지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 해도, 재생에너지를 수도권으로 운반하는 송전선 조차 부족하다. 송전선을 세워야 하는 한전 역시 이런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녹록지 않다.
이 가운데 '금융'의 역할이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환경 개선과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금융 '녹색분류체계(Taxonomy·택소노미)'에 따라 친환경 산업을 선별·지정하고 혜택을 주는 '녹색금융'이 대표적이다. 녹색금융을 통해 대한민국 주력 산업의 녹색 경쟁력 강화를 위한 1차적 지원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녹색금융은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등 대한민국의 주력산업들이 녹색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소요되는 장기적 노력 모두를 지원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녹색분류체계에서 제외되는 사항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맹점을 보완하고 기업의 탄소중립과 녹색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전환금융'을 통해 장기간 질서있는 녹색전환을 지원한다.
일본에서는 지난 2월 세계 최초로 그린트랜스포메이션(GX) 경제이행채, 즉 전환금융을 위한 채권을 발행했다. 향후 10년간 총 20조엔 규모의 GX경제이행채를 발행해 민간 기업의 저탄소 전환을 지원할 계획이다. 우리나라도 우선 반도체 산업의 '녹색 경쟁력'을 강화하고, 주요 산업의 저탄소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녹색금융과 더불어 전환금융 도입이 시급하다. 제22대 국회에서 탄소중립기본법을 근간으로 해 녹색금융과 전환금융을 위한 법제도 정비에 속도를 내길 기대한다.
박용진 KIS자산평가 ESG사업본부장 yongjin.park@kisprici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