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와 정부가 일제히 상법 개정 공론화에 나서고 있다. 금융당국이 앞장서 기업 경영진의 충실의무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어 정부에서도 야당을 중심으로 일반주주 권익 보호를 핵심으로 하는 상법 개정안 발의가 잇따르고 있다. 재계에서도 경영권 방어를 위한 상법 개정안을 논의의 물꼬를 틔우며 법안 경쟁을 예고하고 나섰다.
1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제22대 국회 개원 이후 이달 들어 발의된 상법 개정안은 총 7개에 이른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추가하는 개정안은 물론 주식 병합시 병합 사유와 비율을 사전에 통지하도록 하고, 분할 합병 신설회사에는 신주 배정을 금지하도록 하는 등 그간 경영권 안정을 이유로 경영계가 강하게 반발해 온 법안이 대거 포함됐다.
금융당국 역시 이어지는 상법 개정안에 연일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2일 열린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업지배구조' 토론회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 및 주주의 이익보호'로 확대하는 방안 등에 대해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밝혔다. 이 원장은 이어 지난 15일에는 기자간담회를 열어 “소액주주 보호 장치를 늘리는 것과 배임죄 처벌을 없애거나 기준을 명확히 함으로써 형사처벌 범위를 확실히 하는 건 병행돼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금융당국과 야당의 파상공세에 상장기업은 죽을 맛이다. 이미 정부 차원의 밸류업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는 상황에서 마땅히 반대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해서다. 특히 밸류업 정책 가동 안팎으로 한국의 낙후된 지배구조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된 요인으로 지적받고 있는 상황이다. 자연스레 일반주주의 권익 확대가 '밸류업'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나마 이 원장이 뒤늦게라도 '배임죄 폐지' 카드를 꺼내들어 준데 안도하는 분위기다.
재계와 상장기업은 국회에 반대 건의서를 제출하겠다며 대응 방안 마련에 한창이다. 오는 26일에는 상장회사협의회, 코스닥협회, 한국경제인협회 공동으로 경영권 방어를 위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세미나에서는 포이즌필(경영권 침해 시도가 있을 때 기존 주주가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과 같은 경영권 방어 제도를 상법에 도입하는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재계는 금감원까지 이번 상법 개정 논의에 군불을 때고 있는 만큼 추후 경영계와 주주 권익 보호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개정안이 여당 및 정부를 중심으로 발의될 수 있도록 측면 지원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전자주주총회 도입부터 주주총회 결의 요건 강화, 주주제안 남용 방지책 등 상장 관련 규제 해소 방안을 상법 개정 테이블에 올리는 것이 재계의 목표다.
익명을 요구한 상장사 관계자는 “상법에 이사의 충실의무 범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기업인의 경영 판단 원칙을 보다 명확히 하는 것이 선제되어야 한다”면서 “금감원에서도 소액주주 보호와 배임죄 폐지 여부를 함께 거론한 만큼 이번 상법 개정 과정에서 다각도의 검토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류근일 기자 ryuryu@etnews.com